사설칼럼

조선일보

30만 군중의 집단 모욕..국가원수 영부인의 수난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1. 01. 16. 09:02 수정 2021. 01. 16.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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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4월 10일 칭화대학에서 성적 모욕을 당하는 왕광메이의 모습/ 공공부분>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40>

대다수 현대국가의 헌법은 누구든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재판청구권을 보장하고 있다. 또한 공정한 재판의 보장을 위해 무죄추정의 원칙, 증거재판주의, 죄형법정주의를 기본전제로 명시하고 있지만······.

정치권의 음해공작, 언론의 허위날조, 대중의 마녀사냥, 법조계의 정치편향은 끊이지 않는다. 캥거루 법정의 원님재판, 킬링필드의 인민재판, “~카더라” 통신의 인격살해가 판을 친다. 누구든 인민재판의 피고가 되면, 재판도 받기 전에 만신창이가 돼버리고 만다. 특히 한 여성이 공격의 표적이 되는 순간, 잔악무도한 집단린치가 가해지곤 한다.

1967년 4월 10일, 중국 국가원수의 영부인 왕광메이(王光美, 1921-2006)는 30만 군중 앞에서 집단 성희롱의 노리개로 전락했다. 1963년 인도네시아 방문 시, 멋진 옷을 입고 짙은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진주목걸이를 착용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왕광메이는 강제로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한 채로 수십 만 군중 앞에서 극심한 성적 모욕을 당해야만 했다.

류샤오치를 향한 칼끝: “당권파를 타도하라!”

1967년 4월 10일 마오쩌둥의 명언이 늘 인용되던 “인민일보” 제1면 오른쪽 맨 위 박스엔 “문화혁명에 관한 중공중앙위의 결정”이 실렸다. “이번 운동의 중점은 바로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당내 당권파(黨權派)의 숙정(肅整)이다.” 1면의 박스 바로 아래는 “투쟁의 큰 방향을 단단히 장악하라!”는 “해방군보(解放軍報)”의 사설(社說)이 실렸는데, 요지는 같았다.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한줌의 당내의 당권파들은 가장 주요한, 가장 위험한 적인(敵人, 인민의 적)들이다······. 우리는 군중을 믿고, 군중에 의지하고 군중노선을 견지한다.”

<1967년 4월 10일자 인민일보 제1면, “투쟁의 큰 방향을 단단히 장악하라!”>

당권파의 우두머리는 바로 류샤오치였다. 당권파의 “자산계급 사령부”로부터 “권력을 탈취”해서 “무산계급 사령부”를 건설해야 한다고 선전하던 시절이었다. 이미 류샤오치는 권력을 잃고 가택연금 상태에서 정치적 식물로 연명하고 있었지만, 그에겐 마지막 임무가 남아 있었다. 바로 인민재판에 회부돼서 비투(批鬪, 비판투쟁)당해야만 하는 임무였다. 그 때문에 마오쩌둥은 은퇴하고 낙향하게 해달라는 류샤오치의 간청을 물리쳤다.

이날 중공중앙의 기관지 “인민일보”가 당권파의 타도를 문혁의 제1과제로 내세운 이유는 분명했다. 바로 그날 중국 최고의 명문 칭화대학교의 캠퍼스에선 “왕광메이 비투대회”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칭화대는 왕광메이를 공격하는 비투의 현장으로서 최적의 장소였다. 문화혁명이 공식적으로 시작된 1966년 5월 16일부터 7월 말까지 50일간 류샤오치는 베이징의 주요 기관에 공작조를 파견해서 질서정연한 계급투쟁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때 그의 부인 왕광메이가 칭화대 공작조를 이끄는 주동적 인물이었다.

왕광메이에 의해 “우파(右派)”의 낙인을 받고 공개적으로 비판당했던 칭화대 공정(工程) 화학과의 콰이다푸(蒯大富, 1945- )는 몇 달째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왕광메이를 칭화대 캠퍼스로 불러서 모욕을 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짜릿한 복수의 활극은 있을 수 없었다. 중국의 비판언론인 양지성(楊繼繩, 1940- )에 따르면, 문혁 당시 칭화대 캠퍼스는 마오쩌둥과 류샤오치의 각축장이었다.

<“혁명조반파여, 연합하라!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의 자산계급 반동노선을 철저히 깨부수자!”/ chineseposters.net>

18시간 계속된 집단 테러

1967년 4월 10일은 왕광메이의 46년 평생에서 가장 긴 하루였다. 그날 새벽 6시경 칭화대학 캠퍼스에 끌려온 왕광메이는 6시 반부터 칭화대 정강산 병단(井岡山兵團)에 둘러싸여 세 시간 동안 심문(審問)을 당해야만 했다. 오전 10시, 칭화대 캠퍼스에선 “왕광메이 비투(批鬪, 비판투쟁) 대회”가 개최됐다. 새벽부터 홍위병들에게 시달려 녹초간 된 왕광메이는 구름처럼 모여든 30만 군중 앞으로 끌려 나갔다. 2시간 40분 동안 진행된 비투는 오후 1시 경 막을 내렸지만, 1시부터 왕광메이는 제2차 심문에 시달려야만 했다. 3차 심문은 오후 5시 반부터 시작됐는데 밤 10시가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집단테러가 꼭두새벽부터 밤까지 18시간 넘게 진행됐다.

3차에 걸친 홍위병의 심문 내용은 녹취록으로 전해진다. 녹취록의 분석에 앞서 우선 10시 경 거행된 “왕광메이 비투대회”를 살펴보자. 미국의 좌파 지식인 윌리암 힌턴(William Hinton, 1919-2004)은 “왕광메이 비투대회” 참여자들과의 심층 인터뷰에 근거해서 그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67년 4월 10일, 이른 아침부터 확성기를 단 대형트럭이 베이징 시가지 곳곳을 돌며 칭화대 캠퍼스에 예정돼 있는 ‘왕광메이 비투대회’를 알렸다. 대학, 중등학교, 공장 등등 300개가 넘는 단위(單位)들에 초청장이 뿌려졌다. 대표단만 따로 보낸 단위도 있었지만, 휴일을 선언하고 단체로 참가한 단위들도 있었다. 버스들이 밀려서 도로를 메우고, 인파가 길거리에 넘쳐났다. 캠퍼스 밖까지 확성기가 꽉 들어찼다.

네 개의 의자를 붙여 만든 단상에 왕광메이가 올라섰다. 수만 명이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왕광메이는 높은 자리에 놓였다. 왕광메이는 영국 귀족들이 가든파티 때 쓰는 챙이 넓은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군살이 삐져나오는 꽉 끼는 치파오를 입고, 굽이 뾰족한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그 모습은 그로테스크했다.

성난 군중은 분노의 구호를 외쳤다. 우귀사신(牛鬼蛇神)을 타도하라! 혁명을 끝까지 완수하자!’ 수만 명이 동시에 외쳐대는 구호가 파도처럼 캠퍼스에 진동하며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탁구공 목걸이를 목에 걸고서 비틀거리는 왕광메이의 귓전을 때렸다.” (Hinton, Hundred Day War: The Cultural Revolution at Tsinghua University [Monthly Review Press, 1972])

<수십 만이 운집한 칭화대 본관 앞 비투의 단상에 올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성적 모욕을 당하는 왕광메이의 모습/ 공공부문>

류빙의 증언: “모든 것은 모함이었다!”

류빙(劉冰, 1921-2017)은 문혁 당시 칭화대 당위원회 제1 부서기였다. 자택 연금 상태에 있던 류빙은 그날 아침 9시경 붉은 완장을 찬 두 명에 양팔을 잡힌 채 범인 취급을 당하며 칭화대 본관 비투의 현장까지 끌려갔다. 끌려가는 과정에서 그는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왕광메이 잡아왔어? 왕광메이도 안 잡아왔는데 무슨 대회를 하지?” 사람들은 홍위병에 끌려나와 모욕당하는 왕광메이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어 안달이 난듯했다.

류빙은 일단 본관 밑 지하실에 감금됐는데, 그곳에서 나무의자에 앉은 채 여러 명의 감시를 받고 있는 전 베이징 시장 펑전(彭眞, 1902-1997)을 보았다. 당일 비투의 현장에 왕광메이, 펑전 이외에도 루딩이(陸定一, 1906-1996), 보이보(薄一波, 1908-2007) 등 중앙정치의 거물들, 칭화대 총장 장난샹(蔣南翔, 1913-1988)과 류빙을 포함한 200여명의 칭화대 간부들이 함께 끌려 나왔다.

대략 오전 10시 전후 해서 “왕광메이 비투대회”가 선포됐다. 단상엔 펑전, 루딩이, 장난상 등이 모두 비투의 단상에 끌려올라갔다. 콰이다푸를 비롯한 홍위병들은 그들의 팔을 잡고 머리를 짓누르는 이른바 “제트기” 기합을 놓았다. 그들은 왕광메이에 모욕을 주기 위해 얼굴에 천박한 분칠을 했다. 현장에서 직접 비투를 당하면서 상황을 또렷이 목도했던 류빙은 31년 후 출판한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국가주석의 부인, 중앙정치국 위원, 국무원 부총리, 최고법원의 원장, 인민공화국 장관들이 이런 모욕을 당하다니?! 내가 보기에 홍위병의 모든 발언을 죄다 모함일 뿐이었다. 진정 문자 그대로 ‘죄를 들씌우는데 구실이 없어 걱정하랴?’(欲加之罪, 何患無詞)” (劉冰, <<風雨歲月: 淸華大學 文化大革命 憶實>> 淸華大學出版社, 1998)

당시 중학교 1학년생이었던 둥지친(董继勤, 1952- )은 자발적으로 왕광메이 비투대회에 참석했던 많은 학생 중 한 명이었다. 49년이 지나 2016년 중문판 “뉴욕타임즈”와 인터뷰를 할 때, 그는 어린 시절 그의 머리에 떠올랐던 “기괴한 생각”을 얘기했다. 당시 그는 다른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비투를 당하는데, 오직 왕광메이만 서있는 모습이 불공평하다고 느꼈다. 왕광메이가 국가주석의 부인이라 특별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1963년 인도네시아 방문 시 류샤오치와 왕광메이의 모습. 그해 4월 12일에서 5월 16일까지 동남아의 4개국을 순방했다. 이때의 복장 때문에 왕광메이는 군중 앞에 끌려나가 성적 모욕을 당해야만 했다./ 공공부문>

아마도 어린 둥치친은 홍위병의 의도를 전혀 간파하지 못했던 듯하다. 홍위병들이 왕광메이만 의자 위에 올라서게 한 이유는 멀리 있는 군중에게도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탁구공 목걸이를 목에 걸고 단상 의자 위에 서 있던 왕광메이는 가장 수치스러운 성적 모욕을 당하고 있었다. 화려한 의상과 세련된 몸치장이 반혁명적 행위라 단죄되던 시대의 미망이었다.

물론 그날의 비투는 일회적 사건이 아니었다. 왕광메이는 그 후 12년의 긴 세월 동안 대다수 정치범이 수용되는 베이징 창핑구의 친청(秦城)감옥에서 독방생활을 견뎌야만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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