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장은교 기자 2021. 1. 17.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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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뒷모습 / AFP연합뉴스

“여러분은 정말로 나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1월 6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 백악관 앞에 모인 지지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라 전체에 지옥(hell) 같은 일이 벌어질 거야.”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싸운다. 지옥처럼 싸운다. 당신들이 지옥처럼 싸우지 않으면 더 이상 이 나라를 가질 수 없을 거야.” 트럼프는 알았을까. 잠시 후 불과 몇미터 앞에서 정말로 지옥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걸.

트럼프가 트럼프답게 퇴장하고 있다. 미국 정치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인물로 대통령까지 된 그는 마지막까지 충격적인 뒷모습을 보이고 있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희망을 얘기해야 할 때 미국의 눈은 온통 의사당 습격과 더 있을지 모를 폭동, 대통령의 두 번째 탄핵에 쏠려 있다. 트위터 등 주요 소셜미디어(SNS)는 현직 대통령의 계정을 정지시켰고, 대통령 지지단체(프라우드 보이스)는 캐나다에서 테러단체 지정 논의대상이 되고 있다. 세계를 경악시킨 의사당 폭동은 트럼프 시대의 고별인사일까, 새로운 비극의 시작일까.

마지막까지 충격적인 트럼프다운 퇴장
트럼프가 지지자들에게 예고한 ‘지옥 같은 일’은 조 바이든의 대통령 당선이 의회에서 확정되는 것이었다. 1월 6일 워싱턴 의사당에선 대선결과를 최종 확인하는 상·하원 합동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다. 지난해 선거결과 민주당 대선후보 바이든이 총 306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해 232명을 얻은 트럼프를 큰 차이로 이겼다. 상·하원에선 회의를 열고 바이든의 승리를 공식적으로 확정하는 절차를 진행하기로 돼 있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이날 백악관 앞에서 ‘미국 구국 집회(Save America Rally)’를 열었다. 전날인 5일 밤부터 음모론 집단인 ‘큐어넌’ 지지자들과 트럼프 극렬지지자들이 모인 ‘프라우드 보이스’, 극우성향 단체 ‘스리 퍼센터스’ 등을 중심으로 2000여명이 워싱턴에 모였다. 트럼프는 트위터에 6일 집회에 많이 참석하라며 지지자들을 독려했다. 6일 오전 11시 백악관 앞에서 열린 집회엔 약 8000명이 모인 것으로 추산된다.

오후 1시쯤 박수와 함께 연단에 오른 트럼프는 선거결과를 ‘사기’라고 부정하고, 의회가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더 이상 참지 말라”고 지지자들을 자극했다. 대선 승리를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역할을 맡은 마이크 펜스 부통령에게 “할 일을 하라”며 바이든 승리 확정발표를 거부하도록 종용했고, 민주당 의원들과 공화당 의원들을 지목해 비난했다. 특히 그는 임기부터 대선 이후까지 차츰차츰 자신에게 등 돌린 공화당 의원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약해빠진 공화당 의원들이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오늘은 앞선 어떤 날들보다 더 중요한 날”이라며 “저기(의사당)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볼 것”이고, “우리는 이제 의사당으로 갈 것이고 내가 여러분과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트럼프의 발언을 분석한 워싱턴포스트는 “대통령이 여러 번 ‘지옥’이라는 단어를 썼고, 자신의 지지자들을 ‘트럼프를 위한 군대’라고 표현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트럼프는 이날 지지자들이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왔다”고 주장하며 “수십만명”이라고 부풀려 말했다. 그의 연설이 끝나기도 전에 지지자 중 일부는 의사당으로 이동했다. 트럼프는 약속과 달리 의사당 행진에 동참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TV로 시위대가 의사당 담벼락을 기어오르고 경찰을 밀치며 의사당에 난입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트위터에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도 의사당에 침입한 이들을 “애국자”라고 표현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주요 소셜미디어는 그의 메시지가 폭동을 부추기는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보고 삭제한 뒤 이후 계정을 정지조치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지지자들이 1월 6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자의 당선을 최종 인증하는 회의가 열린 워싱턴 연방의회 건물 벽을 기어오르고 있다. / AP연합뉴스

탄핵과 기소 위기 동시에 맞아
이날 폭동으로 상·하원 회의는 중단됐다. 시위대는 상·하원 의장석과 집무실을 점거했다. 의회 경찰 2명이 사망했는데 1명은 시위대에게 소화기로 구타당했다. 시위대 3명도 사망했다. 워싱턴 연방 검찰은 반란, 내란, 소요, 살인, 폭행, 절도 등의 혐의를 두고 이번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 마이클 셔윈 검사장 대행은 “사건에 관여된 모든 행위자를 조사할 것”이라고 말해 트럼프도 수사대상이 될 수 있다고 알렸다. CNN 등 미국 언론은 트럼프에게 내란 선동 혐의가 적용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의회는 트럼프 임기를 불과 9일 남기고 탄핵절차에 돌입했다. 단 하루도 이런 대통령을 자리에 둘 수 없고, 반드시 정치적 퇴출 절차로 내보내야 한다는 주장에 민주당과 공화당 일부 의원까지 동참했다. 뉴욕타임스는 11일 사설에서 “탄핵이 새 정부 출범 초기에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등 여러 부작용이 있을 수 있지만, 공화국의 존재가치를 묻는다는 점에서 탄핵해야 한다”고 썼다.

탄핵과 기소 위기를 동시에 맞은 트럼프는 오락가락하고 있다. 시위대를 두둔하던 그는 지난 7일엔 의사당을 습격한 이들을 “민주주의를 더럽혔다.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공격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이 질서 있게 진행되도록 도울 것이라고 했다가, 9일엔 취임식 불참을 선언했다. 12일엔 워싱턴 시위 때 자신의 발언은 “적절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임기 마지막 몇주 동안 마지막 권한을 이용해 자신과 가족들의 ‘셀프 사면’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짜 문제는 트럼프의 마지막이 아니다. 지금까지 ‘트럼프 지지자들’로 불린 세력이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 것이냐다. 뉴욕타임스는 이날 워싱턴 집회에 참석한 이들을 “21세기 미국 각지에서 분노로 모인 이들”이라고 표현했다. ‘트럼프’라는 매개로 모였지만, 각기 다른 목적과 이유를 가지고 미국사회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켰다는 것이다. 한 참석자는 트럼프에게 실망감을 드러내며 “트럼프가 우리더러 집에 가라고 했는데 그는 마러라고의 리조트로 돌아가면 되지만 우리는 폐업한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며 “트럼프가 없더라도 우리의 운동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트럼프가 예고한 ‘지옥’은 트럼프가 없어도 계속될 트럼프 세상일지 모른다.

장은교 기자 ind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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