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매일경제

661년 평양성 전투 (2)

임기환 입력 2021. 01. 21. 15:24

기사 도구 모음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고구려사 명장면-115] 661년 8월 대동강 입구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상륙한 소정방 군은 마읍산(馬邑山)을 빼앗아 진영을 구축하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했다. 소정방과 당군은 기세등등했다. 소정방은 1년여 전에 금강 입구 기벌포에 상륙하여 저항하는 백제군을 제압한 뒤 별로 힘들이지 않고 백제를 정복한 승리의 기억이 떠올랐을 것이다. 이제 천하의 명군주 당태종도 실패했던 고구려 정복마저 내 손으로 이루면 역사의 명장으로 칭송받을 게 분명했다. 그러하니 소정방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게다.

그러나 평양성은 사비성과는 달랐다. 높고 장대한 성벽부터 사비성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백제 사비성은 스스로 성문을 열고 항복했지만, 평양성은 당군에 맞설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연개소문은 군사를 부릴 줄 안다고 자부하던 터였다. 그래서 소정방은 서두르지 않고 평양성을 포위하고 기다렸다. 시간은 자신 편이라 생각했다. 8월에 신라 문무왕이 직접 출정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북진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9월에 압록강에 도착한 글필하력 군이 남생의 고구려군을 대파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한껏 고무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행운은 소정방 편이 아니었다. 남하를 기대했던 글필하력 군대는 철륵의 반란이 일어나자 고종의 명령을 받아 회군해버렸다. 그럼에도 당 조정은 소정방 군대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격하도록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당 조정은 북진하는 신라군의 지원에 기대를 걸고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이런 기대도 차질을 빚고 말았다. 문무왕이 거느린 신라군은 7월에 출정하여 8월에 남천정(현재 이천)에 이르렀지만 백제부흥군이 옹산성에서 항거하고 있다는 소식에 이를 제압하느라 지체하고 있었다. 9월 27일에 옹산성을 진압했지만 더 이상 진군하지 않았고, 당의 사신이 왔다는 소식에 10월 29일에 회군하고 말았다.

당시 당 고종은 태종무열왕의 조문 사절을 신라에 보냈는데, 이는 아마도 명목이었을 뿐이고, 사실은 신라군이 평양성 공격에 합류하지 못한 점을 추궁하는 사신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면 신라군은 정말 옹산성의 백제부흥군 때문에 평양으로 진격하지 못했던 것일까?

대전시 계족산성 : 옹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문화재청

당시 신라군은 문무왕이 직접 출정하였기 때문에 김유신 등이 대장군으로 참여하는 등 660년 백제 정벌군에 못지않은 대군을 동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군세가 일개 성을 차지한 백제부흥군으로 인해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신라는 백제부흥군이 백제 지역 도처에서 발흥하는 현실에서 대규모 신라군을 평양성 전투에 투입하면 후방에서 일어난 백제부흥군 기세를 꺾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던 듯하다. 즉 신라 입장에서는 고구려 정벌보다 백제부흥군을 제압하여 백제 지역을 온전히 손에 넣는 것이 보다 시급한 상황이었다.

문무왕이 상중(喪中)에서도 원정 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당의 출정 요구가 강력하였기 때문에 일단 문무왕이 직접 고구려 정벌군을 편성하여 북진하는 모양새를 갖추면서 실제로는 백제부흥군 핑계를 대고 진격을 중지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당도 신라의 이러한 속내를 모르지는 않았을 게다. 그렇기에 태종무열왕의 조문을 핑계로 사신을 보내어 문무왕의 소극적인 태도를 추궁하였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한편 수도 평양성을 포위당한 고구려 조정과 연개소문의 사정은 어떠하였을까? 이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평양성이 외적에 의해 공격당한 때는 612년 수양제의 대군이 침공할 때였다. 전술상 수나라 수군을 외성으로 끌어들여 격파하기도 했고, 수나라 30만 별동대를 평양성 외곽까지 유인하여 살수에서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는 어디까지나 전략 전술상으로 고구려군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661년 지금 상황은 예기치 못한 당군의 기습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연개소문과 고구려 조정은 꽤나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소정방 당군이 바닷길로 대군을 보냈지만, 이 군대 하나로 그치지 않으리라는 점은 분명했다. 요동지역에서 육로로 진공해올 군대도 방비해야 했다. 요하를 건너는 당군이라면 요동에 포진한 성곽들이 적절하게 막아낼 테지만, 만약을 대비하여 압록강 방어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연개소문은 장남 남생에게 수만 군을 주어 압록강을 방어케 했다. 수도가 포위된 상황에서도 수만 군을 압록강 전선에 배치한다는 점을 보면 평양성을 지키는 군사력이 충분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660년에 우군이었던 백제가 허망하게 멸망한 뒤 나름 군사적 대비를 늦추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연개소문의 방어 전략은 적절했지만, 아무런 경험 없는 아들에게 그런 막중한 책임을 맡긴 것은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생은 글필하력 군에게 3만명을 잃는 대패를 당하고 겨우 몸만 빠져 도망쳐왔다. 압록강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것은 요동에서 지원도 차단당하고, 한편으로는 글필하력 군이 진격해오면 평양성을 포위하는 당군 전력이 더욱 강화될 게 뻔했다. 연개소문은 내심 초조해졌지만, 아직 행운은 그에게 있었다. 남생 군을 격파한 글필하력 군이 본국으로 회군했던 것이다. 여기에 북진하던 신라군도 10월이 넘도록 아직 한강 이남에 머물러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제 소정방 군대만 상대하면 될 터다. 연개소문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평양성을 포위한 당나라군의 약점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라군의 북진이 늦어지자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 군에게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다름 아니라 군량 등 보급 문제였다. 8월에 평양성을 포위할 때만 해도, 9월이면 글필하력 군이 보강되고, 신라군도 참여하여 평양성에 대한 대공세를 펼치리라 예상했다. 이제는 대공세는커녕 하루하루 군량 보급이 걱정될 판이었다. 애초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고, 더구나 보급 문제는 신라군이 책임져주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신라군은 보급은커녕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9월 말 신라군이 웅산성의 백제부흥군을 진압할 무렵에 당군 함자도(含資道) 총관 유덕민(劉德敏)이 와서 소정방 군대에 군량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를 보면 소정방 군대는 이미 9월께부터 군량 부족이란 고초를 겪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겨울철도 다가오고 있고 신라군의 지원은 아직 요원하여 상당히 위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소정방 군이 회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당의 조정도 회군 명령을 내리기보다는 신라 문무왕에게 보급을 재촉할 뿐이었다.

다음 회에 언급하겠지만 이때 귀국하지 못한 소정방 군은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만다. 이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숱한 전쟁을 치루고 특히 당 고종 때에는 동쪽·서쪽에서 승승장구하며 나름 명장이라는 평가를 받은 소정방이 군량 부족이라는 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이런 패배를 예상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정방 군은 평양성 일대에 머물렀다. 그 이유를 짐작할 만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필자는 귀환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 아마도 귀환할 바닷길을 차단당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고구려 수군이 당나라 수군을 격파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사실이 있는지조차 기록상으로는 알 수 없다. 단지 정황상 추정할 뿐이다. 그동안 고구려가 수·당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지만 고구려 수군의 활약을 보여주는 기록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고구려 수군의 진면목은 이렇게 기록에서 지워져버린 것이 아닌가 짐작한다.

평양성을 포위하며 기세등등했던 소정방 대군은 이제 퇴로까지 차단당한 채 몰살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남쪽 신라로부터의 구원이 유일한 생존 길이었다.

연개소문과 소정방의 한판 대결에 김유신이 끼어들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