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기부할 마음이 들겠나
“절대 기부하지 마세요. 뒤통수 맞습니다.”
삼성 측이 이건희(1942~2020) 회장의 개인 미술 소장품 1만2000점의 가격 감정(鑑定)에 착수했다는 본지 단독 보도<18일 자 A1면>가 나가자, 미술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감정 목적과 미술품의 향후 행방을 예단할 수는 없지만, 초일류 수집가였던 이 회장의 소장품은 그 움직임만으로 한국 미술 지형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감정가는 조(兆) 단위일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자코메티의 청동 조각 등 국립현대미술관 1년 예산보다 비싼 서양 미술품이 경매 시장에서 해외로 유출될 경우 “국가적 손실”이라는 게 미술계 지배적 의견이다. 기부 등의 방식으로 국내에 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댓글 여론은 달랐다. 기부해도 좋은 꼴 못 볼 것이라는 비아냥이 대다수였다. 현 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어느 수준인지 보여준다.
미술품 수집은 돈놀이가 아니다. 안목과 열정 없이는 불가능한 데다, 돈이 있어도 못 구하는 미술품이 태반이다. 그렇기에 공들여 수집한 ‘미래의 문화재’를 공익 차원에서 선뜻 내놓게 하려면 응당 그에 맞는 대우가 필요하다. 미술품 기부 시 세제 혜택을 주는 물납제도가 논의되고 있으나, 그것은 신뢰와 예의라는 전제를 요한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좋은 뜻으로 기부해도 추후 세무 당국의 표적이 될까 두려울 것 같다”고 했다.
스페인 대표 미술관 티센보르네미사(Thyssen-Bornemisza)는 독일의 거부(巨富) 티센 남작 컬렉션에서 비롯했다. 더 넓은 수장 공간을 찾던 남작에게 스페인 정부가 적극 유치 공세를 벌였고, 그들의 정성이 흡족했던 티센이 1993년 루벤스·뭉크·고흐 등의 명품 700여점을 거의 기부 수준의 헐값에 넘겼다. 영국 테이트미술관은 설탕 무역으로 부를 일군 기업가 헨리 테이트의 소장품과 자금 기부를 모태로 한다. 이 부자들이 아니었으면 빛나는 걸작이 대중에 공개되지 못했을 것이다. 국가는 이들의 이름을 기렸다.
그러나 기부 문화를 고양할 최소한의 움직임이 국내에서는 감지되지 않는다. 기부 유치를 위한 전략 수립조차 없다. “먼저 나서기 조심스럽다”는 것이다. 떡 줄 사람 의사가 먼저겠으나, 떡 줄 마음이 들도록 노력은 해야 한다. 지금껏 국립현대미술관에 기부된 작품 수는 3966점. 미술관에 따르면 이 중 기부로 세제 혜택을 받은 사람은 없다. 모든 기부는 고귀한 것이지만, 기부품 목록에 미술관을 한 단계 끌어올릴 세계적 작품 역시 없다. 늘 그래왔듯 개인의 선의(善意)에만 기댄다면 국립미술관에 피카소 그림 하나 없다는 오랜 자조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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