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현의 '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5) 단순한 '음료' 에서 '도'의 반열에 오른 '차'

2021. 1. 22.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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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문화로 끌어올린 '육우'

중국 당나라 때(618~907년) 차 산업 규모가 갑자기 커졌다. 차를 마시는 인구가 증가했고 무엇보다 국경 너머 유목민들이 마치 블랙홀처럼 많은 양의 차를 수입해 갔다. 순식간에 차는 큰돈이 되는 사업으로 부각됐다. 큰 규모로 차 농장을 하는 농민이 등장하고, 거대한 자본을 가진 상인도 차에 투자했다. 안록산의 난을 겪으며 재정적으로 곤란해진 정부가 차 가격에 10분의 1가량 세금을 매겼는데 작은 행정 단위인 현에서 거둔 차 세금이 전국에서 광산업으로 거둔 세금보다 많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차는 1000년 넘게 중국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는 주요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당연히 차를 바라보는 당나라 사람들 인식도 달라졌다. 그전에 차는 그저 음료에 불과했다. 당나라 사람들은 차를 마시는 과정에서 ‘도’를 찾았다. ‘다도’ 개념이 이때 등장했다.

차에 이렇듯 높은 지위를 부여한 데는 한 사람의 영향이 크다. 그의 이름은 ‘육우’. 중국 사람들은 육우를 ‘차의 성인’이라고도 부르고 ‘차의 신’이라고도 부른다.

육우는 본래 고아였다. 후베이성 경릉 호숫가에 버려져 있는 아이를 730년경 지적선사가 발견했다. 당시 아이는 추위에 떨며 울고 있었는데 기러기 떼가 날개를 펴서 보호해주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적선사가 아이에게 육우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그러나 지적선사와 육우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지적선사는 육우를 불제자로 키우려 했으나 육우는 “승복을 입고, 머리를 깎고, 스님이라 불리는 것을 혹시라도 가족이 듣게 되면 불효가 아니겠습니까? 나는 공자의 글을 읽겠습니다”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지적선사는 육우의 마음을 돌리려고 온갖 궂은일을 시켰다. 그러나 유가 공부를 하고 싶다는 육우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종종 회초리가 부러질 때까지 매를 맞았으나 변치 않았다.

마침내 12살이 되던 해, 육우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절에서 도망쳐 극단에 들어갔다. 그가 남긴 자서전에 따르면 육우는 얼굴이 못생기고 말도 더듬었다고 한다. 그러나 매우 총명해서 연극배우로 성공했다. 각본도 쓰고 작곡도 했다. 이 시절 육우는 황족 이제물의 눈에 띄었다. 이제물은 육우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자신의 문집을 주며 격려했다. 또한 유가 공부를 할 수 있게 화문산 사숙에 소개해줬다. 육우는 이곳에서 공부하는 틈틈이 산에 올라 야생 차나무 잎으로 차를 만들었다. 사숙의 스승은 육우가 차를 몹시 좋아하는 것을 알고 우물을 파줬다. 우물물은 거울처럼 맑고 달고 사계절 내내 마르는 법이 없었다. 화문산에서의 생활은 훗날 육우가 문인으로 성공하고, 차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데 밑거름이 됐다.

화문산 사숙에서 7년간 공부를 마치고 하산한 육우는 당나라 시인이면서 관리였던 최국보를 만난다. 최국보는 육우보다 46살이나 많았지만 나이와 신분을 잊고 친한 친구가 됐다. 함께 차를 마시고 물을 평가했고, 문장을 논했다. 이 시기 육우는 지금껏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해보려고 마음먹었다. 차에 관한 책을 쓰는 것이다. 그 첫 단계로 쓰촨성과 후베이성 경계 지역으로 가서 그곳의 차나무를 살펴보기로 했다. 754년이었다. 다음 해인 755년 당나라에 큰 변고가 일어났다. 안록산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안록산은 본래 이란계 아버지와 돌궐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민족이었다. 이민족에 관대한 당나라에서 절도사까지 했으나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다. 9년간 지속된 이 반란으로 당나라 인구의 70%에 해당하는 3600만명이 사망했고 당나라는 피폐해졌다. 많은 사람이 집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육우도 피난민 행렬에 껴 양쯔강을 건넜다. 그 와중에도 육우는 자신이 세운 목표를 버리지 않았다. 후베이, 장시, 장쑤, 저장성 등지의 여러 차 산지를 다니며 농민들이 차 만드는 것을 관찰하고, 때로는 자신이 직접 산에 들어가 차를 만들었다. 좋은 물을 만나면 멈춰 차를 끓여 마시고 물맛을 평가했다.

▶차를 마시는 것은 행실이 바르고 덕을 갖춘 사람에게 적합

762년에는 저장성 호주 초계에 오두막을 짓고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교연이나 황보염 같은 마음 맞는 인사들과 교류하는 한편, 짬짬이 차 산지 답사를 이어가고 옛 책을 읽으며 차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다.

그가 쓰고자 한 것은 책 한 권으로 차의 역사부터 재배, 가공까지 꿰뚫는 차의 백과사전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는 이 방대한 작업에 천착했다. 그리고 마침내 780년에 ‘다경(茶經)’을 완성했다. 중국 최초, 나아가서는 세계 최초의 차 전문서다. 육우는 이 책을 완성하는 데 거의 30년을 투자했다. 인생의 반을 이 일에 쏟아부은 셈이다.

‘다경’은 총 10장으로 이뤄져 있다. 차 산지의 토양과 기후, 차를 만들 때 필요한 도구와 만드는 방법, 차를 끓일 때 필요한 도구와 끓이는 방법, 차와 관련된 옛 사람들 이야기, 당시 차를 생산하는 지역을 소개하고, 차를 마실 때 필요한 도구 중 어떤 경우에는 도구를 모두 갖춰야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중 몇몇을 생략해도 되는지 썼다. 마지막으로 이상의 각 항목을 그림으로 그려 벽에 걸어놓고 차를 마시며 감상하라고 했다.

‘다경’이 출간되자 당나라 문인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유명 인사들이 앞다퉈 ‘다경’을 베꼈고 호평이 이어졌다. 문인들은 새롭게 차의 매력에 빠졌다. 육우 이전 중국 사람들은 차를 끓일 때 산초나 생강 등을 넣어 죽처럼 만들어 먹었다. 육우는 “차를 이렇게 함부로 끓이는 것은 개골창에 내다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차를 끓일 때 다른 것은 아무것도 넣지 말고 오직 소금만 약간 넣어 간을 하라고 했다. 많은 문인들이 ‘다경’을 펼쳐놓고 육우를 따라 차를 끓여 마시고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들은 이 감흥을 잊지 않기 위해 차에 관한 시를 쓰고 글을 지었다. 당나라가 289년간 지속됐는데, 육우 이전 ‘전당시(全唐詩)’ 등에 수록된 차에 관한 시는 10여편에 불과한 반면 ‘다경’이 출간된 이후에는 378수나 됐다. 또한 육우는 후대 차인들이 어떤 사람이 돼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썼다. 그는 ‘다경’에서 ‘차를 마시는 것은 행실이 바르고 덕을 갖춘 사람에게 가장 적합하다’고 했다.

다음은 육우와 가깝게 지냈던 교연 스님이 쓴 시다. 시에서 차는 더 이상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정신적 수양을 돕는 도구거나 혹은 도달할 목표가 돼 있다. 이것이 당나라 사람들이 차를 대하는 자세였다.

담황색 싹을 골라 금솥에 끓여

흰 자기에 담으니 옥빛 거품이 향기롭구나.

신선이 마시는 불로장생의 약 같다.

한 잔 마시니 혼미함이 씻겨나가고

생각이 청량해지며 천지에 가득 찬다.

두 번 마시니 정신이 맑아지고

홀연히 흩날리는 비가

먼지를 말끔히 씻어내는 것 같다.

세 번 마시고는 득도하였구나.

[신정현 죽로재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93호 (2021.01.20~2021.01.2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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