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기둥' 보러 산길 5시간.. "예술은 발품 판 만큼 보여"

곽아람 기자 2021. 1. 23.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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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출신 유명 미술비평가인 저자, 루마니아 산기슭 '끝없는 기둥' 日 거대 '호박' 등 25년간 탐험 기록
예술의 섬 나오시마에 설치된 구사마 야요이의 '호박'./을유문화사
마틴 게이퍼드의 '예술과 풍경'./을유문화사

예술과 풍경

마틴 게이퍼드 지음|김유진 옮김|을유문화사|352쪽|1만6500원

많은 이들이 묻는다. 스마트폰 앱으로 전 세계 미술관의 명화를 ‘방구석 1열’에서 감상할 수 있는 시대, 그림 한 점 보자고 먼 길 떠나야 할 이유가 있냐고. 사진과 영상도 원본 못지않은데 굳이 비용과 시간 들여 ‘실물’을 보아야만 하냐고.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담집 ‘다시, 그림이다’로 잘 알려진 영국 미술비평가 마틴 게이퍼드(69)는 이렇게 말한다. ”예술 작품을 정확히 감상하려면 거의 항상 돌아다녀야 한다. 단순히 집에 앉아서 이미지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는 작품에 담긴 방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없다. 가상의 경험이 아닌 실제 경험, 즉 실제 작품을 감상하고 실제 사람과 만나는 것이야말로 가장 깊고 풍요로운 경험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아니라 ‘발품 판 만큼’ 보인다. 저자는 미술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슬로 루킹(slow looking·느리게 보기)’이 중요한데, 이는 작품 앞에서 가장 잘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책은 특정 작품을 실견하고 싶다는 충동 때문에 바다를 건너고 대륙을 횡단해 돈키호테 같은 탐험을 일삼은 25년간의 여정을 담았다.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험난한 산길을 5시간 달려 남서부 트르구지우로 향한 것은 브랑쿠시가 1차 대전 중 전사한 루마니아인들을 기리기 위해 고향에 세운 높이 30m 조형물 ‘끝없는 기둥’을 보기 위해서였다. 20세기 미술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지만 영국 미술계에서 실제로 그 작품을 본 사람은 거의 없다. 마침내 실물을 ‘영접’했을 때 저자는 놀랄 만큼 높고 삐죽한 작품의 특성이 루마니아 공예에서 왔다는 걸 깨닫게 된다.

‘모더니즘의 보물섬’ 일본 나오시마는 저자가 계획했던 여행지는 아니었다. 일본 여행이 처음이라 교토의 선불교 정원 같은 완전히 일본적인 것을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실내에서 신발을 벗어야 한다는 규율 등에 피로함을 느껴 익숙한 현대미술을 체험하러 떠나기로 한다. 눈부시게 화창한 봄 나오시마에 도착했을 때, 노란 바탕에 검정 물방울 무늬가 찍힌 구사마 야요이의 2.4m 높이 ‘호박’과 처음 마주친다. “그날 아침 반짝이는 바다를 배경으로 ‘호박’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조각 윗부분에는 원뿔형 푸딩 모양의 섬이 걸려 있었다. 그 공간에는 우리뿐이었다. 이 거대한 ‘호박’은 청과물 가게의 경품과 외계인 우주선 사이의 어디쯤에서 초현실적인 효과를 발현하고 있었다.”

환경과의 상호작용 아래 작품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화가 질리언 에이스는 말했다. “빌어먹을 그림은 벽에 걸 때마다 달라 보여! 매번 빛이 다르거나, 사람이 다르거나, 무언가가 달라.” 작품과 만난 관람자 또한 변하는데 이러한 ‘변화’는 미술가와의 만남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저자는 책의 다른 한 축을 미술가 인터뷰에 할애한다. “인터뷰는 특별한 종류의 대화다. 그리고 좋은 대화에서는 소위 지적 DNA라는 것을 교환하게 된다.”

살점을 칼로 베거나 나체로 얼음 위에 눕는 등 자기 몸을 이용해 작업하는 퍼포먼스 아티스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75)를 인터뷰하기 전까지 저자는 퍼포먼스 아트를 이해하지 못했다. 몸을 얼리고 자해하면서, 운동하고 금연하고 술도 안 마신다는 이 예술가는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을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나는 부엌에서 마늘을 다지다 손을 베이면 울기도 해요. 사람들은 사생활에서 연약함을 느끼고, ‘자존감이 낮은’ 일상적인 정신 상태에서 생활해요. 하지만 퍼포먼스를 하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거대한 대중의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왔을 때의 소감을 저자는 이렇게 적는다. ”나는 살짝 변해 있었다.”

고대 인도 사원과 크로마뇽 동굴 벽화 답사, “앞으로 언제까지 살 수 있겠냐” 묻자 “몇 년, 몇 달, 몇 시간, 몇 분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강렬함이다”라 답한 타계 3년 전, 93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의 만남 등을 통해 무르익어가는 저자의 내면이 섬세하면서도 담백하게 펼쳐진다. “미술을 찾아서 멈추지 않는 여행을 떠난다. 많이 볼수록 더 보고 싶어진다”는 마지막 구절이 비대면의 시대,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 새삼 깨닫게 한다. 원제 The Pursuit of Art. 곽아람 기자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끝없는 기둥'./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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