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만나는 북한 문화유산] ⑭ 해주와 장수산의 역사유적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입력 2021. 1. 23.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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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성과 감영(監營)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고
'해서 팔경' 부용당만이 옛 모습을 간직

[편집자주]북한은 200개가 넘는 역사유적을 국보유적으로, 1700개 이상의 유적을 보존유적으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지역적 특성상 북측에는 고조선과 고구려, 고려시기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75년간 분단이 계속되면서 북한 내 민족문화유산을 직접 접하기 어려웠다. 특히 10년 넘게 남북교류가 단절되면서 간헐적으로 이뤄졌던 남북 공동 발굴과 조사, 전시 등도 완전히 중단됐다. 남북의 공동자산인 북한 내 문화유산을 누구나 직접 가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하며 최근 사진을 중심으로 북한의 주요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서울=뉴스1) 정창현 머니투데이미디어 평화경제연구소장 = 해주는 조선시대 때 황해도의 중심지로 감영(監營)이 있던 곳이다. 1954년 황해도가 2개 도로 나뉘면서 현재는 황해남도의 도 소재지가 됐다. 해주는 본래 고구려의 영토로서 내미홀(內未忽)이라 불리다가 고려 태조에 이르러 '남쪽으로 황해의 큰 바다에 임해 있다'는 의미로 해주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925년 해주성과 성문들이 훼손되기 이전에 촬영된 해주시 전경. 왼쪽으로 2층 문루가 특징적인 순명문이 보이고, 그 북서쪽에 부용당이, 북동쪽에 선화당 건물이 남아 있다. 중앙 뒤쪽으로 용수산이, 그 동쪽으로 수양산 설류봉(뒤쪽)과 장대봉(앞쪽)이 솟아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23.© 뉴스1

1391년(고려 공양왕 3년)에 해주 중심부에 처음으로 해주성을 쌓았고, 이후 1748년(영조 24년)까지 세 차례 개축했다. 이 같은 연혁을 기록한 해주성개축비(보존유적 제994호)가 해주시 영광동에 보존돼 있다.

해주읍성에는 치성(雉城) 14개와 성문 4개가 있었다. 그중 남문인 순명문(順明門)은 해주성을 쌓을 때 세웠는데, 높이 약 4m, 너비 약 9.5m의 축대 위에 중층 문루가 있는 구조였다. 1925년 일제가 해주 시내에 도로를 신설하면서 헐어버려 현재는 문터만 남아 있다(국보유적 제72호).

조선 영조 때 해주성을 개축한 후 세운 '해주성개축비'. 고려 말에 처음 세운 해주성의 연혁이 기록돼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23.© 뉴스1

순명문 북서쪽으로 부용당(芙蓉堂, 국보유적 제68호)이 복원돼 있다. 16세기 초에 처음 세워진 부용당은 연못에 박은 기둥들 위에 세운 독특한 형식의 수중 누정이다. 황해도 관찰사가 집무를 보던 선화당(宣化堂)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예로부터 '해주팔경', '해서팔경'의 하나로 전해져온 부용당은 6·25전쟁 때 불타버렸고, 2003년에 복원됐다. 선화당 등의 전각은 6·25전쟁 때 전부 소실됐다.

일제강점기 때의 부용당 모습(위)과 2003년에 복원된 부용당의 모습.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23.© 뉴스1

해주의 북쪽에는 용수산이, 동북쪽에는 수양산(首陽山, 946m)의 줄기인 장대봉(686m)이 솟아 있고, 그 사이에 옥계저수지가 있다. 여기서 흘러나온 석광천이 시내를 관통해 서해로 흘러들어가고, 남동쪽으로는 연백벌이 펼쳐진다.

해주의 진산(鎭山)인 수양산에는 황해도 3대 산성의 하나인 수양산성이 남아 있다. 이 산성은 수양산의 최고봉인 설류봉에서 장대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남쪽의 골짜기와 넓은 평지를 안에 넣어 쌓은 고구려시기의 산성이다. 성벽은 둘레 5258m, 높이 5m 안팎이며 바깥은 모두 절벽을 이룬다. 현재 성벽은 대부분 조선시대 때 개축한 것이다. 성 안은 수림이 울창하고 깊숙한 골짜기마다 시냇물이 흐르며 수양산폭포까지 있어 경치 또한 수려하다. 수양산성은 보존급 역사유적 제241호로 지정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곳에 세워진 표석에는 '국보유적 제241호'로 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수양산성 성곽(위)과 현재 남아 있는 수양산성 남문 성곽 모습(아래).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23.© 뉴스1

수양산성 동남쪽에는 광조사터가 있는데, 현재 진철대사탑비(廣照寺眞澈大師塔碑, 국보유적 제85호)와 5층탑(보존유적 제987호)이 남아 있다. 진철대사탑비는 고려 초의 고승이자 광조사의 주지였던 진철대사 이엄(利嚴)의 부도비로, 937년(고려 태조 20)에 조성했다. 높이 2m, 너비 1m의 석비로, 고려 건국에 공이 컸던 진철대사가 죽은 다음해에 태조 왕건이 진철(眞澈)이라는 시호와 함께 보월승공(寶月乘空)이란 탑비명(塔碑名)을 짓고 문인 최언휘(崔彦遇)가 대사의 도학과 생애를 적은 비문을 지어 새겼다. 신라 말~고려 초의 역사와 언어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는 금석문이다.

황해남도 해주시 학현동의 광조사터에 남아 있는 진철대사탑비(위)와 광조사5층탑(아래).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23© 뉴스1

해주의 역사유적은 주로 시내를 관통하는 광석천(혹은 옥계천)을 따라 분포돼 있다. 가장 위쪽의 옥계동에 해주석빙고(국보유적 제69호)가 자리 잡고 있다. 광석천 얼음을 겨울에 저장했다가 여름에 공급하던 지하 얼음창고로, 고려 초기에 축조되고 1735년(영조 11)에 개축됐다. 내부를 화강암으로 쌓고 그 위에 흙과 석회를 다져 덮었다.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1.4m 안팎의 사이를 두고 12개의 무지개형 골조를 세우고 그 사이에 큰 판돌을 대서 기찻굴 모양의 천장을 만들었다. 그 위에 흙과 석회를 다져 덮고 잔디를 입혀 무더운 여름철의 태양열을 막았다. 내부 길이 28.3m, 너비 4.5m, 높이 6m이다. 안팎의 구조가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경주 석빙고와 함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

황해남도 해주시 옥계동에 남아 있는 해주석빙고 전경. 고려 초기에 처음 조성된 유적이다.(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23.© 뉴스1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해주5층탑(국보유적 제71호)이 서 있다. 원래 있던 사찰은 없어지고 석탑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이 탑은 고려 초기에 세운 것으로 두 층으로 된 기단 위에 화강암을 다듬어 쌓은 높이 4.7m의 석탑이다.

황해남도 해주시 옥계동에 있는 해주5층탑(왼쪽)과 해청동에 있는 해주9층탑(오른쪽). 모두 고려시기 석탑이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23.© 뉴스1

여기서 더 내려가면 '불류담'이 나온다. 광석천의 경치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돌들 사이를 누비며 흐르던 물이 너럭바위 아래로 폭포처럼 떨어져 소용돌이치면서 맴도는 연못이다. 이 불류담의 위쪽에 지환정(志歡亭)이, 아래쪽에 사미정이 자리 잡고 있다. 행정구역상 옥계동에 있는 지환정은 18세기 말에 건립된 아담한 정자로 1981년에 복구됐다. 사미정(四美亭, 보존유적 제213호)은 19세기 후반기에 건립됐고, 이 정자에 오르면 사방이 다 아름답게 보인다 하여 사미정이라 하였다. 6·25전쟁 때 파괴되었던 것을 1966년에 복원했다.

황해남도 해주시 옥계동에 있는 사미정. 19세기 후반에 건립됐고, 1966년에 복원됐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23.© 뉴스1

사미정에서 광석천을 건너 동쪽으로 가면 광석동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안중근 의사가 태어난 곳이다. 안 의사는 7살 때 고향을 떠나 북서쪽에 있는 신천군 두나면 천봉산 밑 청계동으로 이사했다. 현재 광석동에는 생가가 남아 있지 않고, 청계동에 집터와 부친 안태훈 진사의 묘가 남아 있다.

해남도 신천군 두나면 청계동의 안중근 의사 집터. 안 의사는 해주시 장대봉 아래 광석동에서 태어나 7살 때 이곳으로 이사했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제공) 2021.01.23.© 뉴스1

사미정에서 광석천을 따라 내려가면 해청동 해주공원이 나오고, 이 공원 안에 다라니석당(陀羅尼石幢)이 하나 서 있다. 해주다라니석당(국보유적 제82호)는 돌에 다라니 경문을 새겨 높은 기둥 형태로 조각한 석조물로, 현재까지 알려진 4개의 석당 중 하나다. 석주에는 '대불정다라니경'(大佛頂陀羅尼經)이 범어로 음각되어 있고, 전체 높이가 5.3m이다. 이 석당은 묘향산 보현사에 있는 성동리다라니석당(국보유적 제59호)과 형식상 같다.

황해남도 신천군 해청동 해주공원 안에 남아 있는 해주다리니석당.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23.© 뉴스1

해청동에는 해주9층탑(국보유적 제70호)도 남아 있다. 원래 5층탑이었으나 다른 탑의 부재가 일부 섞여서 9층탑이 됐다고 하는데,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다. 현재는 8층 탑신까지만 남아 있고, 전체 높이는 6m이다. 기단부나 탑신부에 별다른 장식이 없어서 고려시대 말기에 조성된 석탑으로 평가된다.

해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조선시대 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栗谷) 이이(李珥)다. 그는 황해도 관찰사, 홍문관 부제학을 거친 후 약 5년간 관직에서 물러나 처가와 친가가 있던 해주와 파주에 소현서원과 자운서원을 세우고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현재 황해남도 벽성군 석담리에는 그가 세운 소현서원(紹賢書院, 국보유적 제79호)이 복원돼 있다. 소현서원은 석담천 맑은 물이 아홉 굽이를 돌면서 돌못을 이루고, 천하절승으로 이름난 석담구곡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명소인 다섯 번째 굽이 '은병'에 자리 잡고 있다.

황해남도 벽동군 석담리에 있는 '석담명승지' 안내도. 이곳에 율곡 이이(李珥)가 세운 소현서원이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23.© 뉴스1

건립 당시에는 사당·강당·재실·전사청·창고 등이 있었지만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 없어졌다가 1950년대 이후에 복원됐다. 네모난 담장 안을 다시 앞뒤 두 구역으로 나누어 앞 구역은 강당, 뒤 구역은 사당 공간으로 활용했다. 담장 바깥에는 청계당(聽溪堂)과 요금정(瑤琴亭)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이 있다. 사당 앞 왼쪽 천조각이라는 작은 비각 안에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쓴 비문이 있다. 조선시대 서원건축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소현서원은 강릉의 오죽헌, 안동의 도산서원, 개성의 숭양서원 등과 함께 대표적인 서원의 하나로 꼽힌다. 현재 파주시는 이율곡이 세운 자운서원(파주시 소재)과 소현서원의 교류를 추진하고 있다.

황해남도 벽동군 석담리 '석담명승지' 안에 있는 소현소원의 묘정비(1830년 세움)와 은병정사(강당). 은병정사 뒤쪽으로 사당 건물이 있고, 오른쪽으로 숙소인 요금정(瑤琴亭)이 자리하고 있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23.© 뉴스1

수양산의 북쪽 신원군에는 '황해금강'으로 불리는 장수산이 솟아 있다. 수많은 봉우리들과 절벽들, 천태만상의 기암들이 자연적인 조각미를 이루고 있어 경치가 아름다운 산이다.

장수산에는 고구려시기에 쌓은 장수산성(보존유적 제243호)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장수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눠져 있었고, 성안에는 무기창고를 비롯한 많은 건물이 있었다. 지금은 외성과 내성의 남문과 북문터, 일부 집터들만 남아 있다.

황해남도 신원군에 있는 장수산 전경. 오른쪽 능선 위로 장수산성 성곽이 보인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23.© 뉴스1

또한 장수산에는 과거 500여 개의 잘과 암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묘음사(妙音寺)터를 비롯한 몇 개의 절터와 묘음사의 부속암자였던 현암(縣庵, 국보유적 제81호)만 남아 있다. 현암은 현암은 장수산의 계곡미를 자랑하는 석동 12계곡의 120m나 되는 높은 절벽 위에 달아 매 놓은 듯이 지은 특색 있는 건물로 일명 '다람절'이라고도 부른다. 이 암자는 적어도 통일신라 때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암은 정면 6칸(11.2m), 측면 3칸(6.35m)의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다. 오른쪽의 정면 1칸, 측면 3칸은 부엌이고 왼쪽의 정면 1칸, 측면 2칸과 부엌을 제외한 후면에 툇마루를 놓았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건축양식을 간직한 사찰로 평가된다.

황해남도 장수산에 있는 묘음사 현암 전경. 기암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어 장관을 연출한다.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23.© 뉴스1

신원군과 북쪽으로 인접해 있고, 넓은 재령평야가 펼쳐져 있는 신천군에는 여러 유적들이 남아 있는 자혜사(慈惠寺, 국보유적 제80호)가 자리하고 있다. 조선 초기 효령대군의 원찰(願刹)이었던 자혜사는 신천읍에서 약 3㎞ 떨어진 서원리는 마을이 있다. 탑이나 등의 형태로 보아 고려시대에 처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건물은 1592년(조선 선조 25)에 다시 지은 것이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승방, 5층석탑과 석등이 남아 있다.

본전인 대웅전은 정면 3칸(9.28m), 측면 4칸(9.25m)의 건물로, 대웅전의 형식으로는 보기 드물게 전면에 툇마루를 깔고 앞을 틔웠다. 자혜사 대웅전은 조선 초기 건축 양식의 일면을 보여 준다.

황해남도 신천군에 있는 자혜사 전경.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23.© 뉴스1

자혜사 대웅전 앞에는 고려초기의 5층석탑(국보유적 제169호)과 석등(국보유적 제170호)이 남아 있다. 5층탑은 한 변이 4.2m 정도 되는 지대석 위에 조성한 4각 석탑으로, 2층 기단 위에 5층의 탑신부와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탑의 전체높이는 5.95m 정도다. 전체적으로 균형감과 안정감, 세련미가 느껴진다. 제작 양식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 앞에는 고려 초기의 석등이 서 있다. 화강석으로 만든 석등은 전체 높이가 3.88m이고, 고려 후기 부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황해남도 신천군 자혜사 대웅전 앞에 있는 5층석탑과 석등. (미디어한국학 제공) 2021.01.23.© 뉴스1

남과 북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때 해주-개성-파주를 잇는 통일경제특구 개발에 합의했지만 아직까지 구상에만 그치고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 이 구상이 본격화 되어 개성에서 해주를 거쳐 신천까지 답사하며 이율곡, 안중근 등의 유적을 둘러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해본다.

yeh25@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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