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조선일보

겉으론 엄숙, 실제는 문란..권력자의 이중 생활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 입력 2021. 01. 23. 09:00 수정 2021. 01. 23. 15:41

기사 도구 모음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1950년 많은 여성들에 둘러싸여 담뱃불을 붙이고 있는 모택동/ 공공부문>

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41회>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김정일 등 20세기 공산정권의 권력자들은 이중인격의 연극배우로서 정신분열적 인생을 살다 갔다. 혁명의 “광장”에서 공산정권의 권력자들은 “천리혜안의 예지와 해박한 식견”을 갖추고 “신비한 판단력과 무비(無比)의 담력”을 가진 완전무결한 “불세출의 천재”들로 미화됐지만, 밀실 속의 그들은 기껏 추레하고 나약한 병든 영혼일 뿐이었다. 돌이켜 보면, 20세기 공산 전체주의는 불완전한 인간이 절대 권력자가 되어 인격신의 배역을 연기해야만 하는 허술한 플롯의 부조리극이었다.

최고영도자의 여성편력 “집요하게 정욕을 드러냈다”

2003년 7월 9일 중국 칭화대학을 방문한 고(故)노무현 대통령은 “마오쩌둥 주석을 존경한다”고 발언했다. 그가 존경한 “마오쩌둥”은 역사적 실체가 아니라 1980년대 운동권 서적들에 그려진 혁명신화의 영웅일 뿐이었다. 역사적 실체로서의 마오쩌둥은 혁명신화 속의 영웅처럼 고매하지도 숭엄하지도 않았다. 현실의 그는 극심한 편집증, 의심증, 불안증, 과대망상증, 불면증, 발기부전증 등을 앓는 병약하고 위태로운 한 명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인격신을 연기해야 하는 늙은 배우의 중압감 때문일까? 만년의 마오는 병적인 여성편력을 보였다.

22년간 마오쩌둥을 따라다닌 주치의 리즈수이(李志綏, 1919-1995)에 따르면, “마오의 사생활은 경악스러웠다. 겉으론 엄숙하고 장중하고 자상하고 친절한 노신사 같았지만, 그는 노상 여인들을 노리개 삼았다. 특히 만년에 마오의 생활은 극도로 문란했다. 그에겐 다른 오락이 없었다. 여인들을 완롱(玩弄, 끼고 놀며 희롱)하는 게 유일한 취미였다. [마오의 경호를 책임졌던 중앙경위국장] 왕동싱(汪東興, 1915-2015)은 말했다. ‘인생 막판에 한몫 보려 했나? 아니라면 어떻게 그토록 집요하게, 그토록 큰 정욕을 드러낼 수 있나?’” (李志綏, <<⽑澤東私⼈醫⽣回憶錄>> [台北市 : 時報文化出版企業有限公司, 1994]).

“부르주아 퇴폐 문화”...인민들은 연애도 못해

최고영도자가 맘껏 젊은 여인들을 완롱할 때, 중국의 대다수 인민들은 성적 자유조차 제대로 누릴 수 없었다. 연인사이의 성적 접촉은 물론, 청소년의 풋풋한 연애감정까지도 부르주아 퇴폐문화의 잔재로 비판당하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방송, 언론에 날마다 등장하는 단발머리, 뿔테안경, 군복차림의 장칭(江靑, 1914-1991)은 혁명적 숭고미의 심벌이었다. 여성이라면 모두가 장칭을 닮아야만 하는 정치적·문화적 강제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한 강퍅한 혁명의 문화 속에서 여인들은 머리손질도, 몸치장도, 화장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여성적 아름다움’(feminine beauty), 여성의 자기치장(self-adornment)은 부르주아 사회 성차별의 결과라 교육되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예뻐지려는 인간의 욕구는 막을 수가 없었다. 일부의 여성들은 여성미가 공산당의 이미지 제고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정치적 명분을 만들어서 미모를 가꿨다.

<“우리들의 문학예술은 인민대중을 위한 것이다. 우선 노동자, 농민 병사를 위해야 하며, 노동자·농민·병사를 위해 창작하고, 노동자·농민·병사에 이용될 수 있어야만 한다. - 마오쩌둥.” “문화혁명의 기수 장칭 동지를 따라 학습하자!”/ 공공부문>

그 어떤 전체주의 정권도 인간의 연애감정과 성적 욕구를 막을 수는 없다. 정치적·사회적 억압 속에서도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숨어서 몰래 사랑을 나누었다. 은밀한 로맨스가 드러나면 사회적 매장과 정치적 파멸을 면할 수 없었다. 혼전성교, 혼외정사 등 일체의 성적 일탈은 반혁명적 유맹(流氓) 행위로 철저히 비판됐다. 동성애자들에 대해선 일체의 관용도 없었다. 특히 남자동성애자들은 공개적으로 모욕당하고, 낙인찍히고, 투옥됐다. 문혁 시기부터 중국형법 106조에 따라 남자동성애자들은 정기적으로 구속됐다.

중국공산당의 집단주의적 인간관에 따르면, 개개인의 신체적 에너지는 집산화의 현장에서 전체적인 생산량의 증진을 위해 효율적으로 사용되어야만 했다. 성적 방종 혹은 성적 일탈은 곧 집체적 노동력의 손실을 의미했다. 전체의 이익을 위해 국가가 개개인의 성적 욕구를 통제하는 상황은 극심한 인간소외를 야기했다.

“젊음을, 이상을, 희망을, 사랑을 강탈당했다”

성에 눈을 뜨는 사춘기의 청소년들에겐 견디기 힘든 정신적·육체적 억압이었다. 문혁 이후 출판된 수많은 홍위병들의 회고록에는 사생활 침해를 고발하는 원한 서린 기록들이 많다.

“우리는 젊음을, 이상을, 희망을, 사랑을 강탈당했다. 사랑 때문에 사람들은 비판당하고, 공격당하고, 투옥되기도 했다. 사랑에 관한 책은 모두 포르노물로 취급됐다. 사랑노래는 저속하다 비판됐고, 사랑에 빠진 남녀는 부랑인 취급을 당했다.” (章德寧, 岳建一, <<中國知靑情戀報告>>(光明日報出版社, 1998) “서문”에서)

구체적 사례를 몇 개 살펴보자.

사례1) 농촌에서 수년 간 살고 학교로 복귀한 한 고교생 소녀는 어느 날 러브레터를 받았다. 별 생각 없이 그 사실을 친구에게 말했을 뿐인데, 주변 학생들은 그녀를 따돌리며 책상에 침을 뱉거나 분필로 욕설을 적고, 자전거 바퀴에 구멍을 내기도 했다.

사례 2) 홍위병들과 여행한 후 임신한 15세의 소녀는 가족의 질타, 주변의 시선, 동료들의 가십을 견디지 못하고 “부끄러워서 살 수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맸다.

사례 3) 16세 소년에게 러브레터를 받은 한 소녀는 답장을 보내 “계급의 적들이 날뛰는 지금 어떻게 그토록 수치스러운 짓을 할 수 있냐?” 따지면서 그를 “반혁명분자”라 비판했다.

사례 4) 문혁이 이미 종언을 고하고 2년 쯤 지난 1978년 즈음 쓰촨성의 한 대학에 발생한 사건. 학교 당국이 몰래 연애하던 커플에게 당장 헤어지라 명령을 내렸다. 커플이 저항하자 학교 당국은 두 사람 모두에게 정학 조치를 내렸고, 졸업할 땐 각각 서로 멀리 떨어진 도시 반대편 지역에 직장을 배정했다.

<영어로 저술되거나 번역되어 구미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문혁 시대 “잃어버린 세대”의 상흔문학(傷痕文學) 작품들>

여성 혐오 폭력... “반동 분자 마누라에게 자유는 없다 "

1967년 4월 10일, 왕광메이는 새벽 6시에 칭화대학에 끌려가서 6시 반부터 정강산 병단 홍위병들에 둘러싸여 “심문(審問)”을 당하기 시작했다. 오전 10시 비투 직전까지 진행된 중구난방의 “심문” 녹취록을 보면, 홍위병의 “심문”은 우격다짐과 윽박지름으로 허위자백을 받아내는 정신적 고문에 가까웠다.

심문이 막 시작될 때 홍위병들은 왕광메이 앞에 치파오을 던져 놓고 당장 입으라고 명령했다. 그녀가 1963년 인도네시아 방문 시 입었던 짧은 소매의 화려한 무늬 없는 흰색 개량 치파오였다. 왕광메이는 완강히 저항했다. 홍위병들은 “인도네시아에서 당신이 입었던 바로 그 옷”이라며 압박했지만, 왕광메이는 당시 자카르타는 무더운 여름이었다고 반박했다. 홍위병들이 “오늘은 바로 당신에 대해 투쟁하는 날”이라 소리치자 왕광메이는 “죽어도 입을 수 없다”며 버텼다. 홍위병들이 거칠게 다그치자 왕광메이는 정색하고 말했다.

“너희들은 내 인신의 자유를 침범할 수 없어!”

이에 홍위병들은 “인신의 자유”를 외치는 왕광메이에 폭소를 터뜨렸다. 그들은 곧 왕광메이를 향해 쏘아붙였다.

“당신은 삼반(三反)분자의 마누라며, 반동적 자산계급분자, 계급이기분자일 뿐이다. 대(大)민주를 말하지 말라! 소(小)민주도 베풀 수 없다.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다. 오늘은 당신에 대해 전정(專政, 독재)하는 날이다. 당신의 자유는 없다!”

홍위병들은 그렇게 왕광메이에게서 인신의 자유를 강탈했다. 인민에겐 민주를, 인민의 적에겐 독재를 행한다는 마오쩌둥의 ‘인민민주독재’ 원칙 그대로였다. 이미 계급이기분자로 낙인찍힌 왕광메이에겐 최소한의 기본권도 보장되지 않았다.

<1966년 4월 문혁 직전 미얀마 방문 당시의 류샤오치와 왕광메이의 모습. 문혁사가들은 해외방문 시 왕광메이의 화려한 의상이 장칭의 시기심을 촉발했다고 추측한다./ 공공부문>

1967년 4월 10일 칭화대 “비투대회”(비판투쟁 대회)에서 홍위병들은 왕광메이에게 몸에 꼭 끼는 흰색 치파오를 입히고, 챙이 큰 모자를 쓰게 한 후, 탁구공 목걸이를 하고 하이힐을 신은 채로 단상 위의 의자에 올라서게 했다. 30만 군중 앞에서 왕광메이를 모욕주고 조롱하기 위함이었다. 그 밑바탕엔 분명 문혁시대 특유의 여성혐오증(misogyny)이 깔려 있었다.

원자물리학 석사였던 왕광메이는 외국어에도 능통해서 국공내전 발발 직전 미국무장관 조지 마샬(George Marshall, 1880-1959)이 충칭에 직접 와서 평화협상을 주재할 때 중공 측 통역관으로 참여했던 발군의 인재였다. 또한 왕광메이는 장칭보다 일곱 살 연하인데다 출중한 미모로 대중적 인기가 높았다. 마오쩌둥이 류샤오치를 시기했듯, 장칭은 왕광메이를 질시했다. 다수 문혁 연구자들에 따르면, 중앙문혁소조의 장칭이 바로 그날 왕광메이의 비투 복장의 디테일을 직접 지시했다. 아마도 그날 왕광메이에 가해진 여성혐오증의 폭력은 장칭의 시기심에 기인했던 듯하다. <계속>

<1967년 4월 10일 비투 현장의 왕광메이/ 공공부문>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