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20년 전 공사현장 유해물질, 백혈병 '산재 인정'

김원진 기자 2021. 1. 23.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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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독성물질과 건강 피해 사이 인과관계는 산업재해 판정에서도 종종 핵심 쟁점이 된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의 백혈병 발병이 대표 사례다. 최근에는 20여년 전 공사 현장에서 10년 가까이 일하며 벤젠에 수년간 노출된 정황이 산재로 인정됐다. 오래 전 공사 현장에서 일한 노동자의 업무상 질병이 인정된 드문 사례다.

최모씨(당시 45세)는 1992년부터 10년간 공사 현장에서 배관설치 업무를 했다. 실내체육관, 군청의 소방시설, 스프링클러 설치 공사 현장을 다녔다. 그는 도색하는 도장 작업노동자로 일하거나 용접을 했다. 도장공은 벤젠 노출 위험이 크다. 벤젠은 백혈병 발병 가능성을 높이는 화학물질로 꼽힌다. 1996년에서 2006년 사이 국내에서 산재 백혈병을 인정받은 50건 사례 중 10건이 도장 작업노동자였다.

한 주상복합아파트 건설현장. | 주간경향 자료사진


최씨는 2018년 2월 관절 통증이 생겨 병원을 찾았다. 통증은 멈추지 않았다. 2018년 5월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항암 화학요법 치료를 반복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최씨는 최초 진단 6개월 만인 2018년 11월 숨졌다. 최씨의 유족은 2019년 1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했다.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2020년 11월 “최씨의 급성 골수성 백혈병은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된다”고 결정했다. 위원 7명 중 5명이 ‘인정’ 의견을 냈다. 위원회는 최씨가 각종 분진과 용접 흄, 도료에 섞인 벤젠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김승현 노무법인 시선 노무사는 “산재의 노동자 입증 책임을 다소 완화한 법원 판례가 있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산재 인정에 엄격한 편이다. 이번 사례는 역학조사 결과에 의문을 품고 산재를 인정한 전향적인 판정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근로복지공단은 노동자 측에게 엄격한 인과관계 입증을 요구해왔다. 질병의 발병이 노동자의 작업환경 때문이라는 과학적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화학물질의 인체유해성은 입증이 까다롭다. 기업이 원료나 작업환경 정보를 잘 제공하지 않아 입증이 더 쉽지 않았다. 최씨의 사례에서는 수년간 같이 일했던 작업반장이 최씨가 일했던 사업장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법원이 근로복지공단보다 인과관계를 폭넓게 판단한다. 법원은 업무와 업무상 질병 사이 인과관계가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돼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법원은 법적·규범적 관점에서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되면 산재라고 판단한다. 이 때문에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인정 판정에 불복해 행정법원에 가 결과가 뒤바뀌는 사례가 적지 않다.

지난해에는 혈액암의 일종인 미만성 거대 B세포 림프종에 걸린 노동자의 산재가 법원에서 인정된 사례가 있었다. 근로복지공단에서는 산재가 아니라고 판정했지만, 법원은 다른 판단을 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재판장 유환우)는 2020년 5월 반도체 제조공정에서 일했던 A씨가 포름알데히드 등 인체 유해물질에 노출돼 질병에 걸린 것을 산재로 인정하는 판결을 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연구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발병 원인으로 의심되는 요소들과 노동자 질병 사이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것이 현재의 의학 수준에서 곤란하더라도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라고 했다.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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