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26시간 같은 이 느낌, 뭐지?

서부원 2021. 1. 23.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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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사 산중 일기] 황홀한 여명을 보며 아이들을 떠올리다

[서부원 기자]

▲ 백련사의 여명 처음엔 가슴 벅찬 감동이었지만, 이젠 새벽 예불을 마치고 법당을 나서면, 매일 보게 되는 새삼스럽지 않은 풍경이 되었습니다.
ⓒ 서부원
 
산중 생활은 청아한 목탁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새벽 4시 반, 절이 잠을 깨는 시간이다. 아직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이다. 밝음이라곤, 하늘에 점점이 박힌 무수한 별들과 달빛뿐이다. 어둠 속에 소리와 빛이 만나 또 그렇게 하루가 열린다.

어느 곳에서도 똑같은 별과 달은 뜰 것이다. 단지 보이지 않고, 올려다보지 않을 뿐이다. 하늘의 별빛과 달빛보다 몇 배는 더 밝은 인공의 빛이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땅을 뒤덮어서다. 쏟아지는 별이 주는 낯선 설렘에 하마터면 그 숫자를 일일이 헤아려볼 뻔했다.

언젠가 산골 대안학교 졸업생에게 물었다. 학교의 자랑거리를 하나만 말해보라고. 지레 독특한 커리큘럼과 자유로운 학교 분위기를 첫손에 꼽을 거라고 여겼다. 아니라면, 선생님이 친구 같다거나 물과 공기가 맑다는 등의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늦은 밤 별들이 우리 학교로 쏟아져 내려요."

그땐 예상치 못한 답변에 순간 당황했지만, 산중에서 지내고 있는 지금 그 느낌을 알 것 같다. 빛난다는 표현은 어딘가 모자라다. 점점이 박힌 보석처럼 반짝거린다는 게 더 적확하다. 종이 위에 별빛을 나타낼 때 왜 눈송이 모양으로 그리는지 이제야 알겠다.

절도, 숲도, 새도, 사람도 동시에 깨어나는 시간

어둠 속에 스님 한 분이 목탁을 두드리며 경내를 돌고 있다. 새벽 예불을 드리기 전에 절 안팎을 청정하게 하기 위한 절차다. 불교에선 이를 '도량석(道場釋)'이라고 부른다. 스님들에게는 성스러운 의식일 테지만, 절에서 얼마간 묵다 가는 이에겐 '기상 알람'이다.

범종이 울리고 목탁의 리듬에 염불 소리가 얹히면 비로소 새벽 예불이 시작된다. 직전 경내 모든 법당의 문이 열리고, 때마침 숲속 새들의 지저귐이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절도, 숲도, 새도, 사람도 동시에 깨어나는 시간인 셈이다.

처음 새벽 예불에 참석했을 땐 적잖이 당황했다. 예불의 형식과 절차를 전혀 몰라 스님들의 행동을 따라 하는 데 급급했다. 한 스님이 예불 순서와 게송이 적힌 종이를 건넸지만 실상 무용지물이었다. 읽어도 무슨 뜻인지 당최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송은 모두 한글이었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됐다. 한자를 병기했다면 그 의미를 유추해보기라도 할 텐데, 앵무새가 사람을 흉내 내는 꼴이었다. 와중에 지극정성으로 염불만 외워도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민중 불교의 흔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결국, 오늘부터 108배를 시작했다. 예불이라는 낯설고 데면데면한 상황을 이겨내려는 나름의 자구책이다. 언젠가 108배의 의미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불교에서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겪는 번뇌가 108가지라고 보는데, 이를 비워내는 수행법의 하나라는 거다.

종교적 의미를 두지 않더라도, 절을 한다는 건 스스로 겸손해지는 행위다. 불교에서도 절을 '하심(下心)'이라 하여 최고의 수행법으로 삼고 있다. 설령 형식과 절차가 잘못됐다고 해서 손가락질당할 이유가 하등 없다. 더욱이 난 가톨릭 신자다.
 
▲ 예불을 마치고 법당 한쪽에 걸어둔 목탁 목탁은 물고기를 형상화한 도구다. 눈을 감지 않은 물고기처럼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 서부원
 
나름 108배의 공식을 세웠다. 절반으로 나누어, 처음 54번은 지은 죄를 반성하고, 뒤 54번은 소망을 되뇌려고 했다. 부질없는 계획이었음을 깨닫는 데엔 채 3분도 걸리지 않았다. 너무 힘들어서, 죄와 소망을 떠올리기는커녕 절한 숫자조차 제대로 세지 못했다.

절반을 지나자 등엔 땀이 흘렀고 마스크는 이미 축축하게 젖었다. 평소의 익숙한 동작이 아니어서였을까. 무릎과 허리가 아팠고, 허벅지와 종아리가 욱신거렸다. 누군가는 다이어트 운동 삼아 매일 108배를 한다더니, '가성비'로 치면 최고라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이 말이 반복해 들리면 드디어 예불이 끝난 것이다. 과거 영화 제목으로 쓰이게 되면서, 유일하게 들리는 게송이다. 당시 이게 무슨 뜻인가 싶어 부러 찾아본 기억도 난다. '가자, 가자, 깨달음을 얻어 피안으로 가자'는 간절한 바람을 담은 기도문이라고 했다.

가톨릭 신자가 불상 앞에서 절하는 건, 옛날 같으면 우상 숭배 행위라며 비난받았을 일이다. 그것도 108배처럼 종교적인 의미를 담은 의식이라면, 고해성사로도 용서받긴 힘들었다. 그런데, 예불에 참석하면서 두 종교 사이에 접점이 적지 않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깨달음을 얻어 피안으로 가자'는 게송만 해도 그렇다. 함께 고통스러운 세상을 벗어나자는 다짐으로 끝나는 예불과,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누며 마무리되는 미사는 일맥상통한다. 내세관과 수행법은 달라도 종교마다 꿈꾸는 세상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아침이면 고개를 푹 숙이고 학교에 오는 아이들 

새벽 예불이 끝나 법당 밖으로 나서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녘 산자락이 벌겋게 옷을 입는다. 이렇듯 황홀한 여명을 여태 본 기억이 없다. 만약 자연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사람에게 미친다는 게 사실이라면, 필경 저 여명으로부터 전해지는 것이리라.

지금 고성능 카메라가 있다면, 검붉은 빛을 시나브로 걷어내는 여명의 순간을 영상에 담았을 것이다. 검은 하늘이 환해지듯, 검은 숲이 푸른 빛을 찾아간다. 법당의 단청도 여명의 기운을 받아야 비로소 화사해진다. 아침은 태양의 권능을 실감하는 시간이다.

어두운 밤 그림자가 걷히는 법당은 태양으로 인해 매일 새 건물로 태어난다. 단지 해가 뜨는 것일 뿐인데,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한 가슴 벅찬 감동을 준다. 짙은 구름이 내려앉거나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1년 365일 내내 우리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내어줄 풍광 아닌가.

밤엔 쏟아지는 별빛으로 놀라게 하더니, 아침엔 불타는 여명으로 감동을 준다. 자연은 우리에게 그 어떤 수고로움도 요구하지 않는다. 밤 9시 잠자리에 들기 전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면 되고, 아침 5시 반 경 일어나 고개를 돌려 동녘 하늘을 쳐다보기만 하면 된다.

아침 7시. 공양간에 가면서 아이들을 떠올린다. 학기 중이라면, 눈 비비고 일어나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하고 부랴부랴 챙겨 학교 갈 시간이다. 그들은 태어나 지금껏 여명에 감동해 본 적이 있을까. 그들은 과연 아침과 태양에 감사해할까.

등교할 때 아이들은 대개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다. 피곤에 절어서다. 요즘엔 초등학생들조차 자정 이전에 잠자리에 든다는 경우가 거의 손에 꼽을 정도로 아이들의 일상은 팍팍하다. 하루 8시간 넘게 자보는 게 소원이라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등교한 뒤에도 아이들은 하나같이 잠이 덜 깬 상태다. 교실의 모습을 봐서는 아침이라는 걸 알 수 없다. 스마트폰을 보거나 엎드려 쪽잠을 자는 아이들, 둘 중 하나다. 그들에게 황홀한 여명과 쏟아지는 별빛의 감동을 건넬 자신이 없다. 그들에겐 아침도 없고, 밤도 없다.

일어나 새벽 예불에 함께하고, 여명에 심취하고, 경내를 산책하고, 아침 공양을 하고, 방에 돌아와 이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켰는데, 고작 아침 7시 반이다. 물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일 뿐이지만, 왠지 시간을 번 느낌이다. 산중의 일상은 3시간쯤 앞당긴 '서머타임'이라고나 할까.

마치 시간을 늘려 사는 듯한 이 느낌은 어디서 연유한 걸까. 해가 지면 하루를 마무리하고, 동이 트면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단순한 일상이 주는 감춰진 보상은 아닐는지. 인간도 자연의 일부일진대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야 한다며 성현들도 강조하지 않나.

갑자기 전할 말이 있어 한 아이에게 카톡을 보냈는데, 두 시간이 지나도 읽지 않았다. 부러 문자 앞에 '긴급'이라고 적어넣었는데도 반응이 없는 걸 보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게 틀림없다. 해가 중천에 걸렸는데, 아이는 아직 한밤중이다. 카톡으로 그에게 무례를 범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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