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체 갱단 포개버렸다..지지율 90% 찍은 '밀레니얼 독재자'

정은혜 입력 2021. 1. 24. 05:00 수정 2021. 1. 24.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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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월드]
지난해 4월 엘살바도르 수도 산살바도르의 한 교도소에서 속옷차람의 수감자 수백명이 좁은 공간에 포개져 앉아있다. [AP=연합뉴스]

"잠깐 셀카 좀 찍겠습니다. 제 연설을 듣는 사람보다 이 셀카를 보는 사람이 더 많을 거예요"
2019년 9월 뉴욕 유엔총회장 연단에 선 한 30대 국가 정상이 스마트폰을 열고 연신 셀카를 찍었다. 그의 소셜미디어(SNS)에는 '유엔 셀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연단에서 찍은 기념사진이 올라왔다. 이 '당돌한' 정상은 그해 엘살바도르에서 최연소로 대통령에 당선된 나이브 부켈레였다.

그는 이날 "스마트폰이 유엔총회의 미래"라며 기술 변화에 발맞춘 화상회의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자국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바쁜 일주일이란 시간을 유엔총회에 쓰는 건 낭비"라면서다. 자국의 심각한 빈곤, 폭력 문제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다. 그런 문제는 다른 회의에서 이미 논의했다는 것이다.

UN 총회 연설을 시작하기에 전 셀프카메라를 찍는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 [RTE NEWS 유튜브 캡처]

스페인어로 '구세주'라는 뜻의 중미 국가 엘살바도르는 활개 치는 조직폭력배와 높은 범죄율로 악명이 높다. 살인 사건으로 죽는 사람만 2015년 기준 인구 10만명당 104명(브라질 이가라페 연구소)으로 전세계서 압도적인 1위였다. 그해 한국은 0.7명이었다.

현지에선 마라 살바투르차(MS)-13과 바리오-18이라 불리는 양대 폭력조직이 지역을 장악하고 지역민들의 생계를 위협하며 돈을 빼앗아왔다. 양대 조직이 지속적으로 세 대결을 벌인 탓에 살인 사건도 빈발했다. 정치권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군부독재와 내전 이어 우파(ARENA)와 좌파(FMLN) 정당이 번갈아 집권했지만, 조직폭력 문제를 해결하겠다던 공약은 매번 공염불이 됐고 부패만 심화했다.

이런 희망 없는 땅에서 '구세주'로 여겨진 걸까. 혈기 왕성한 (당시) 38세 정치인이 2019년 집권 여당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오랜 세월 엘살바도르를 지배해온 양당이 아닌 제3당 우파 국민통합대연맹(GANA)에 소속된 '아웃사이더'의 반란이었다.

지난해 9월 나이브 부켈레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젊은 나이었지만 정치 신인은 아니었다. 2015년 34세의 나이로 수도 산살바도르 시장에 당선된 그는 운동장, 공원, 도서관, 주민센터 등을 세워 청소년 교육과 복지를 강화하는 정책을 폈다. 젊은이들이 꿈을 펼치고 건전하게 취미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범죄가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힘으로 억누르는 대신 공동체를 복원해 폭력의 싹을 자르겠다는 접근법이었다. 놀랍게도 시장 재임 1년 만에 산살바도르 범죄율은 16% 낮아졌다.

시장이 되기 전에는 사업을 했다. 산살바도르의 성공한 사업가인 아버지의 도움으로 18세 때 광고대행사를 차렸다. 부켈레의 집안은 20세기 초에 남미로 이주한 팔레스타인의 후손이다. 부켈레 아버지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되자마자 '갱단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하지만 시장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그는 지난해 2월 무장한 군인과 경찰 수십명을 동원해 국회로 들어가 논란을 낳았다. 갱단과 대적하기 위해선 군·경 장비를 강화해야 하니 1억9000만 달러(억원)의 차입계획을 승인하라며 압박한 것이다. 열성 지지자들에게는 "국민이 반란을 일으킬 권리는 헌법에 보장돼 있다"며 의회로 모이도록 부추겼다.

지난해 4월 엘살바도르 수도 산살바도르의 한 교도소에서 수감자 수백명이 좁은 공간에 포개져 앉아있다. [AP=연합뉴스]

범죄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한 권위적 포퓰리스트의 면모는 갈수록 강화됐다.

그는 집권한 지 1년 만에 엘살바도르 교도소의 수용 능력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갱단을 잡아들였다. 그러던 지난해 4월 속옷만 입은 수감자 수백명이 한 공간에 앞뒤로 밀착해 바닥에 앉아 있는 사진이 공개되며 충격을 주기도 했다.

지난해 9월 공개된 엘살바도르 교도소 '박스 유치장'의 모습. [AP=연합뉴스]

부켈레 대통령은 갱단원들을 박스같이 생긴 좁은 감옥에 몰아넣도록 지시하고, (군·경이) 거리에서 치명적인 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러면서 "살인을 저지른 갱단원들이 남은 생애 내내 후회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 이동금지령을 위반했다며 수천 명을 감금하기도 했다. 불법 감금이라는 대법원의 판결도 무시했다. "소수의 대법관이 수백만 국민의 생명을 결정할 수 없다" 면서다.

이런 권위적인 방식에 인권 단체 등의 반발도 잇따른다. "최악의 라틴아메리카의 포퓰리스트이자 독재자"라는 평가도 나왔다. 미주 휴먼라이츠워치의 호세 미구엘 비반코 전무는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엘살바도르가 제동 장치 없이 독재 정치로 미끄러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부정부패 의혹도 터졌다. 지난해 9월, 부켈레 대통령이 양대 조직 중 M-13과 결탁한 정황이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산살바도르 시장 시절 범죄율을 떨어뜨리는 데 부정한 방법이 사용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이 지난해 2월 의회를 압박하며 지지자들에 연설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또 월드폴리틱스리뷰(WPR)의 지난 6일 보도에 따르면 코로나19 문제 해결을 위해 엘살바도르가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빌린 3억8900만 달러와 기부금 등으로 들어온 자금이 대통령 측근과 정부 고위관계자들로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엘살바도르 경제학자 안토니오 바레라는 최근 "그는 (대중의 심리를) 심오하게 조종하는 지도자이자 군대의 지원도 받고 있다. 독재정권의 탄생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라고 경고했다.

부켈레의 질주가 계속될지, 제동이 걸릴 지는 다음달 국회의원 선거에서 일단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평판에는 금이 갔지만 그의 엘살바도르 내 인기는 여전하다. BBC에 따르면 그의 지지율은 지난해 90%까지 올라갔다. 오는 선거에서도 여당이 과반수를 차지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어차피 기존 정치권에선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으니 차라리 '밀레니얼 독재자'를 선택하겠다는 주민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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