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봉양하면 신청 무효? 공공임대주택의 허점

김태훈 기자 입력 2021. 1. 24. 13:30 수정 2021. 1. 24.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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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따로 살면 유효, 부모 한 명만 자녀가 부양하면 무효.. 형평성 의문 제기

[경향신문]

서울의 한 공공임대 아파트에서 한 입주민이 복도를 지나고 있다. /강윤중 기자

서울에 사는 무주택 세대주 A씨(39)는 최근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의 공공임대주택 입주자 모집에 신청했다가 신청이 무효처리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A씨의 어머니도 함께 같은 회차의 임대주택을 신청했기 때문에 중복 신청으로 두 세대 모두 무효처리됐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A씨의 어머니는 주민등록표상 A씨와는 별개의 세대를 구성한 또 다른 무주택 세대주로, A씨와 어머니 세대에는 법적으로 당연히 중복되는 세대원이 있을 수 없었다. 문제는 입주자 모집 과정에서 적용하는 ‘무주택세대구성원’의 범위가 주민등록표의 세대원과 다른 데 있었다. 어머니와 떨어져 A씨와 함께 살고 있는 아버지가 A씨 세대의 세대원이었기 때문에 SH공사는 A씨의 아버지가 두 세대에 중복되는 무주택세대구성원이라고 본 것이다.

부모 중 한명만 부양하면 주택 신청 무효
A씨의 세대는 무주택 세대주인 A씨와 그의 배우자, 자녀 그리고 A씨의 아버지로 구성돼 있다. A씨의 어머니 세대는 역시 무주택 세대주인 어머니와 A씨의 형제 1명이 전부다. A씨의 아버지는 이전까지는 일반적인 부부처럼 A씨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하지만 1년여 전부터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A씨 부모 세대는 세 식구가 같이 살기 어려운 좁은 집으로 옮기게 됐다. 결국 아버지만 A씨와 같이 살며 A씨가 부양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공공근로 일자리라도 신청하려고 실거주지인 A씨의 집에 세대원으로 전입신고를 했다.

그러나 이 전입신고가 화근이었다. 실제 거주지는 A씨의 집이었더라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사는 것처럼 기존의 주민등록 세대 구성을 변경하지 않았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A씨와 A씨 어머니가 각기 따로 임대주택을 신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부양하고 있는 아버지를 자녀 세대의 세대원으로 넣은 사소한 차이 때문에 A씨와 A씨 어머니의 공공임대주택 신청은 중복 신청으로 무효 처리되고 말았다.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임대주택 1채가 아쉬운 두 세대가 모두 기회를 아예 잃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A씨의 어머니가 1순위로 신청한 단지는 경쟁률이 2 대 1로 낮았기 때문에 서류상 결격사유만 없으면 그대로 예비입주자로 선정될 수 있었다. A씨는 “해당 공고문을 완전히 숙지하지 못해 결국 무효처리된 것이기 때문에 결과를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은 납득한다”면서 “다만 모든 세대원이 무주택에 입주자격을 충족하는데도 부모가 같이 살면 유효, 부모 중 1명만 자식이 봉양하면 무효가 되는 규정 자체가 형평성이 맞는지는 의문이 생긴다”고 말했다.

이러한 의문은 주민등록법에서의 세대 개념과 주택공급에 관한 규칙에서의 세대 개념이 일치하지 않아 혼동을 불렀기 때문에 초래됐다. 주민등록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한 세대의 세대원은 동시에 다른 세대의 세대원이 되어 중복될 수 있는 여지가 아예 없다. 그러나 주택공급에 관한 규칙에서는 공공임대주택 등을 신청한 신청자와 배우자가 서로 다른 주민등록 세대에 속해 있다고 해도 한꺼번에 같은 세대로 묶여버린다. 게다가 배우자 2명 각각의 직계존·비속과 그 배우자까지 모두 한 세대 안에 포함될 수도 있다.

SH공사 측도 세대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결국 중복 신청으로 분류돼 신청 자체가 무효가 되는 경우가 상당하다고 밝혔다.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가 각각 임대주택을 신청하지 못하는 A씨와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SH공사 관계자는 “공사의 입주자격 검증과 중복청약 무효처리는 ‘주택공급에 관한 규칙’ 등 규칙과 규정에 따라 진행된 것”이라면서 “이렇게 중복청약으로 처리되는 사례가 무수하지만, 개별적인 사정이 있다고 해서 그 사정을 다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말했다.

주택 신청 대기자명부제 도입 필요
공공임대 정책 관련 전문가들은 어떤 법규와 규정이든 허점이 존재할 수밖에 없긴 해도 현실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예외를 포괄할 수 있도록 빠른 보완 조치 역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배우자 2명이 서로 다른 세대로 분리해 이중으로 주택 신청에 나서는 편법을 막으려면 입주자격을 검증할 때 적용하는 무주택세대구성원 범위를 배우자로만 한정하면 되기 때문이다. 분리된 직계존·비속 세대의 세대원까지 한 세대로 묶어버리는 지금의 규정만 보완해도 A씨처럼 노부모를 부양하다가 무주택에서 벗어날 기회가 오히려 줄어드는 부작용을 막을 수 있다. 한 지자체 시정연구원 관계자는 “시행규칙 개정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국토교통부에서 관련 조항을 보완하면 적어도 부모 세대에 이어 자녀 세대까지 무주택이 대물림되도록 방치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의 공공임대주택 관련 규정이 너무 복잡하고 유형도 세분화된 탓에 정작 필요한 주택 수요층에게 제대로 집이 돌아가지 않는 점부터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영구임대주택부터 국민임대, 행복주택, 장기전세, 재개발임대, 매입임대 등 여러 유형이 난립한 공공임대 방식은 각기 신청하는 기관도 다를 뿐더러 같은 유형의 입주자 모집공고 안에서도 신청자격이 서로 다른 경우도 허다하다. SH공사나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 시행기관에서도 매번 다른 유형과 회차에서 입주자를 모집할 때마다 막대한 행정력을 소모하고 있다. 홍인옥 도시사회연구소장은 “임대주택 한 번 신청하려면 컨설팅을 받아야 할 정도로 유형과 각각의 관련 규정이 복잡하게 분류돼 있는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A씨가 겪은 것처럼 부모 세대원을 부양하려다 발생한 형평성 논란도 사실 따지고 보면 고령자나 장애인 등 정보 접근에 취약한 계층은 아예 모집 소식조차 듣기 어려울 정도로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홍 소장은 이런 형평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공공임대주택 공급유형을 단일화하고 대기자명부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대기자명부 제도란 매번 서로 다른 기관에서 복잡한 유형과 자격 분류에 따라 신청자들에게 많은 혼동을 안겨주는 모집공고를 내는 대신 한 번 대기자로 등록하면 명부에 등재된 우선순위에 따라 차례로 주택을 공급받을 수 있는 방식이다. 생업에 종사하느라 바쁘거나 수시로 올라오는 공고를 제때 확인하기 어려운 취약계층에게 대기자명부 도입은 번거로운 과정을 생략하고 형평성을 높일 수 있는 대책이 될 수 있다.

홍 소장은 “대기자명부 제도는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방식으로, 한국이 유별난 예외로 도입하지 않고 있어 여러 부작용을 낳고 있다”며 “대기자명부 제도로 일원화하더라도 지자체별로 자율적인 변용을 가능하게 하면 제도상의 허점이나 예외상황이 나타나더라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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