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어르신 나서자 위·아랫집 악수 나눴다, 층간소음 지혜

백희연 2021. 1. 24.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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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명시의 아파트단지. 광명시는 층간소음으로 환경환경공단 이웃사이센터에 방문 상담을 신청한 비율(2017년 하반기~2018년, 가구당 0.042%)이 아파트 가구가 1만개 이상인 경기도 내 27개 시군(평균 0.062%) 중 가장 낮았다. 중앙포토

‘부부 싸움은 집 밖에 나가서 하겠습니다. 이웃에게 더는 피해 주지 않겠습니다. 지키지 못할 때는 이사 가겠습니다.’
지난해 말 경기도 광명시의 A 아파트 주민들 사이에 오간 각서의 일부다. 각서를 쓴 아랫집 부부는 고성이 오가는 말다툼을 자주 벌였다. 윗집에 이사 온 신혼부부는 수시로 들려오는 부부 싸움 소리에 골머리를 앓았다.

마침 회사의 승진시험을 앞뒀던 윗집 남편은 참다못해 관리실을 통해 수차례 항의했다. 하지만 거의 매일 밤 들려오는 고성은 여전했다. 어느 날 화가 난 나머지 항의하러 나서다 자기 집 현관문을 발로 찼고, 다리에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숫자로 본 2020년 층간소음 갈등.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주민 대표들이 층간소음 갈등 중재

결국 A 아파트의 ‘층간소음관리위원회’가 소집됐다. 동대표를 포함한 6명의 관리위원과 당사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위원장이 “인사부터 나누라” 권하자 윗집·아랫집 남편들이 어색하게 악수했다. 주민 대표들 앞에서 윗집 부부는 소음으로 겪은 괴로움을 호소했고, 아랫집 부부는 잦은 다툼의 원인까지 밝히며 이해를 구했다.

광명시의 한 아파트 단지 층간소음관리위원회의 예방 메뉴얼. 광명시청

두 시간 이상의 회의 끝에 아랫집 부부는 “윗집 부부의 고통을 이해한다”며 “더는 피해를 주지 않겠다”고 각서를 썼다. 위원회에 참석했던 관리소장은 “그 후로 위층 주민이 소음 피해를 호소한 적이 없다”고 전했다.


광명 아파트 80%에 층간소음관리위


광명시는 2013년 전국 지자체 최초로 ‘층간소음갈등해소지원센터’를 설치했다. 아파트 단지가 많은 수도권 신도시의 특성을 고려해 층간소음 갈등을 예방하고 해결을 지원하고자 나섰다.

광명시 주택과 김수정 주무관은 “당시 층간소음 갈등이 극단적인 사건으로 이어지는 뉴스가 계속 나와 경각심이 높아지던 때”라며 “기존엔 주민 사이의 갈등, 단순 민원으로 여겼지만 임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만큼 공공기관이 적극적으로 나서 중재하고 예방하자는 취지로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지속적인 노력 덕에 광명시는 수도권의 여느 신도시보다 층간소음 갈등이 적은 편이다. 광명시에 따르면 2017년 하반기부터 2018년 말까지 층간소음 문제로 환경관리공단 이웃사이센터에 방문 상담을 신청한 비율(가구당 0.042%)이 경기도 내 27개 지자체(평균 0.062%, 아파트 거주 가구 1만곳 이상) 중 가장 낮았다.

광명시가 발간한 층간소음 예방 가이드북. 광명시청

시에 따르면 아파트 단지별로 운영하는 층간소음관리위원회가 층간소음 갈등을 중재하고 예방하는 데 기여한다. 현행 공동주택법은 주민대표로 구성된 위원회의 설치를 권장하고 있지만, 의무 사항은 아니라서 다른 지역에선 실제 설치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광명에선 시가 직접 나서 설치를 유도하고 매년 위원, 관리소장에 대한 교육 등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광명시 전체 91개 아파트 단지 중 79.1%(72개)에서 위원회가 운영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시가 파악된 층간소음 갈등(136건)의 40%가량(53건)이 층간소음관리위원회에서 중재됐다.

경기도 광명시에서는 2013년부터 매년 한 차례씩 아파트 관리소장, 경비원, 층간소음위원회 등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한다. 2020년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비대면 교육을 실시했다. 광명시청


“얼굴 마주하면 대개 풀린다”

중앙일보 디지털스페셜 ‘층간소음 번역기’에 접속해보세요! 아래 이미지를 클릭하거나, 링크가 작동하지 않으면 주소창에 링크(https://news.joins.com/Digitalspecial/343)를 붙여넣어 주세요.


층간소음관리위원회의 위원은 대체로 아파트에 오래 거주한 주민이 맡는다. A 아파트도 40대 후반인 동대표를 빼곤 60대~80대로 구성됐다. 위원장인 80대 주민은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이 중재하면 가해자도 피해자도 어쩔 수 없이 듣게 된다”며 “물론 처음엔 ‘이 노인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는 표정을 짓지만, 시간이 지나면 서로의 사정에 귀 기울이고, 결국 감정을 풀곤 한다”고 전했다.

관리위원들은 감정이 상해있는 당사자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일이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그래도 모이고 나면 대개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고 했다. A 아파트 관리소장은 “얼굴을 마주하기까지가 힘들어서 그렇지, 아무리 화가 난 상태라도 일단 위원회에 나와 이웃 어른 앞에 서면 순한 양처럼 점잖아지더라”고 전했다. 인근 B 아파트의 관리소장도 “당사자끼리만 만나거나 관리실 통해 얘기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해결 어려워 보이는 문제도 만나서 얘기하면 서로 이해할 부분이 생긴다”고 말했다.

물론 모든 갈등을 풀 수 있는 건 아니다. 특히 갈등이 오래됐고 감정이 격화된 상태일 때 그렇다. C 아파트 관리소장은 “최선을 다해도 갈등이 재발하거나 해소가 안 되는 경우도 있다”며 “되레 중재에 나선 이웃을 고소하겠다는 사람, ‘해결 못 하면 알아서 하라’고 으름장 놓는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주민자치와 이웃 공동체의 노력이 층간소음을 둘러싼 갈등을 해소·완화하는 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소음 분쟁을 주로 다루는 이승태 변호사(경기도 환경분쟁조정위원)는 “아파트 공동체에 자치 권한을 강화하거나 층간소음관리위원회에서 결정된 사항이 효력을 부과할 수 있게 하는 게 좋다”고 밝혔다.

이 변호사는 “소송으로 해결하기보다 이웃에게 불편을 끼쳤다는 이유로 위원회에 상정된 것만으로도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미안함을 느끼도록 하는 게 훨씬 도움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차상곤 주거문화개선연구소 소장은 “정부에서 2012년 전문기구(이웃사이센터)를 설립해 층간소음 갈등을 해결하려 했지만, 층간소음 민원은 늘고 있다. 이젠 새로운 접근 방식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백희연·천권필 기자 baek.hee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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