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경향신문]
2007년 9월 미국 뉴욕의 패션 디자이너 마크 에코가 희한한 인터넷 투표를 열었다. 배리 본즈의 756호 홈런 공을 어떻게 처리할지 야구 팬들에게 묻는 투표였다. 스테로이드 등 금지약물 복용 의혹이 짙었던 본즈는 두 달여 전 메이저리그 역대 최다 신기록인 756번째 홈런을 때렸다. 에코는 경매에 나온 그 공을 75만2467달러(당시 약 7억원)나 주고 사들인 뒤 처리 방법을 투표에 붙였다. 보기는 ① 명예의전당에 고이 보낸다 ② 예외를 뜻하는 별표(*) 낙인을 찍는다 ③ 우주로 날려보낸다 등이었다. 약물로 얼룩진 기록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할지를 물은 것이다. 투표 결과 ②번이 다수였다. 에코는 그 공에 큼직한 별표를 새긴 뒤 명예의전당에 기부했다.
1869년 시작된 미국 프로야구 150여년 역사상 가장 많은 홈런을 친 선수는 762개를 기록한 본즈다. 그다음 2위가 755개를 때린 행크 에런이다. 약물 시비가 거세게 일었을 때 ‘역대 최고 홈런왕’을 본즈에서 에런으로 바꾸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하지만 에런은 “과거의 기록을 뜯어고치는 것은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일과 같다”고 반대하며 “그래도 홈런왕은 본즈”라고 말했다.
에런은 1974년 4월8일 베이브 루스를 넘어서는 715호 홈런을 날리며 홈런왕에 올랐다. 당시 에런은 하루에 수천통씩 협박 편지를 받았다. 살해 위협도 많았다. 흑인 에런이 백인들의 우상인 루스의 기록에 근접하자 생긴 일이다. 에런은 “하루도 루스의 이름을 듣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755호를 칠 때까지 조롱과 저주가 끊이지 않았다. 에런은 40년쯤 지난 2014년 인터뷰에서 수십만통의 협박 편지를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옳은 길을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평생 차별과 증오에 맞서온 헨리 행크 에런이 지난 23일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그는 “난 그들이 루스를 잊는 게 아니라 나를 기억해주기 바랐을 뿐”이라는 말을 남겼다. 은퇴 후에도 차분하고 정직하게 인권운동에 매진한 그는 야구 기록을 넘어서는 기품을 보인 ‘진짜 홈런왕’으로 기억될 것이다.
차준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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