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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크 에런, 인종차별 넘어섰던 '진정한 홈런왕'

장민석 기자 입력 2021. 01. 25. 03:01 수정 2021. 01. 25.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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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세로 타계.. 추모 물결
인종차별과 살해 협박 속에서도 베이브 루스를 제치고 홈런 신기록을 세운 ‘영원한 홈런왕’ 행크 에런이 지난 23일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017년 3월 29일 행크 에런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홈구장 안에 세워진 본인의 동상을 보며 미소 짓는 모습. /AP 연합뉴스

“야구의 ‘신성불가침한 기록(sacrosanct record)’이 깨졌다.”

1974년 4월 8일, 행크 에런이 개인 통산 715호 홈런을 쏘아 올리자 많은 미국 현지 매체들이 이렇게 전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소속이던 그는 홈 개막전에서 LA 다저스를 상대로 아치를 그리며 베이브 루스가 보유한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 홈런 기록(714개)을 갈아치웠다.

당시 경기를 중계한 명캐스터 빈 스컬리는 “‘한 흑인(a black man)’이 ‘시대를 아우른 야구 우상(All-time baseball idol·베이브 루스를 가리키는 말)’의 기록을 깨고 기립 박수를 받고 있다”고 전했다.

◇ “도살장 돼지처럼 불안에 떨었다”

1974년 4월 8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행크 에런이 기존 베이브 루스의 714개 홈런기록을 뛰어넘는 715개째 홈런을 치는 순간./AP 연합뉴스/Joe Holloway, Jr. AP 연합뉴스

뿌리 깊은 인종차별 문화 속에서 나온 우여곡절의 홈런이었다. 에런은 통산 홈런 713개로 1973시즌을 마쳤다. 그가 홈런 하나만 더 치면 미국인의 영웅 루스와 타이를 이루는 상황이 되자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다음 시즌이 열리기 전까지 에런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당시 에런이 받은 편지는 100만여 통에 달했다. 대부분은 ‘위대한 루스의 기록은 깨질 수 없으므로 당신은 죽어야 한다’는 협박성 내용이었다. 에런은 “내 아이들은 납치 위협 때문에 감옥에 있는 것처럼 살아야 했고, 나 역시 도살장 돼지처럼 야구장에서 불안에 떨었다”고 말했다.

진정한 홈런왕 에런이 남긴 기록들

그래도 꿋꿋이 그라운드를 지킨 에런은 메이저리그 통산 755홈런(역대 2위), 2297타점(1위), 3771안타(3위)라는 위대한 기록을 남기고 1976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지독한 인종차별을 야구로 극복한 에런은 회고록을 통해 “적어도 홈구장에선 폭언과 조롱에 시달리진 않을 권리를 얻었다”고 밝혔다.

2014년 에런의 80번째 생일을 맞아 열린 파티에서 당시 에릭 홀더 법무장관은 백악관 쪽을 가리키며 “에런 덕분에 저쪽에 사는 한 젊은이는 더 편한 길을 걸어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흑인 최초로 미국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당시 53세)를 가리킨 말이었다.

1974년의 행크 에런./AP 연합뉴스

◇ ‘하나뿐인 진정한 홈런왕’

지난 22일 향년 86세로 별세한 ‘야구 영웅’ 에런은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1934년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의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목화 농장에서 일한 그는 장비를 살 돈이 없어 막대기와 병뚜껑으로 야구를 했다. 메이저리그 진출로 인종의 벽을 허문 재키 로빈슨이 에런의 고향으로 스프링캠프를 온 것이 그에겐 야구 선수의 꿈을 키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54년 밀워키 브레이브스 소속으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은 그는 1957년 시즌 MVP와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1966년엔 마틴 루서 킹 목사가 활동하던 애틀랜타로 브레이브스가 연고지를 옮기며 흑인 인권 운동에도 눈을 뜨게 됐다.

에런은 전성기 시절 183cm, 82kg로 루스(188cm, 98kg)와 같은 거구는 아니었다. 하지만 강력한 손목 힘을 바탕으로 장타를 때려냈고, 홈런을 뺀 안타도 3000개를 넘겼을 만큼 정교함까지 갖춘 타자였다.

메이저리그에서 한 시즌에 50개 이상 홈런을 친 경우는 46회 나왔다. 에런은 ’50홈런 시즌'을 한 번도 기록하지 않고도 역대 2위의 홈런을 쌓아올린 꾸준함의 대명사였다. 1955년부터 1974년까지 20시즌 연속 20홈런 이상을 쳤다.

에런이 33년간 보유했던 통산 최다 홈런 기록은 2007년 배리 본즈(762개)가 깼다. 하지만 본즈가 약물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기록은 빛이 바랬다. 이후 에런은 미국 언론으로부터 ‘하나뿐인 진정한 홈런왕(The One True Home Run King)’ ‘영원한 홈런왕(Forever Home Run King)’ 등으로 불린다.

◇ “에런 덕분에 꿈을 꿀 수 있었다”

불멸의 기록을 남긴 홈런왕의 별세에 미 전역에 추모 물결이 일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3일 트위터를 통해 ‘에런은 베이스를 돌 때 기록만을 좇지 않았다. 그가 편견의 얼음을 녹인 것이 우리가 더 나은 나라로 발전하는 데 도움을 줬다. 에런은 미국의 영웅이었다’고 추모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에런은 우리가 본 최고의 야구 선수였고,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에런의 홈런 기록을 깬 본즈는 “선구자였던 에런 덕분에 흑인 선수들은 꿈을 꿀 수 있었다. 우리 모두 당신이 그리울 것”이라고 했다. 현역 최고 선수인 마이크 트라우트(LA 에인절스)는 “에런을 보며 ‘경기장 안팎에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2004년 7월 올스타전에서 행크 에런이 배리 본즈와 인사하고있다./AP 연합뉴스

‘아시아 홈런왕’ 오 사다하루(81·왕정치) 소프트뱅크 구단 회장은 “에런은 메이저리거들의 거울이 됐다. 훌륭한 인생이었다. 명복을 빈다”는 성명을 냈다. 일본 야구 최고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뛴 오 사다하루는 ‘외다리 타법'을 앞세워 868개의 홈런을 쳤다. 메이저리그는 양국의 수준 차이와 구장의 평균 거리 등을 내세워 그의 홈런 기록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74년 에런(당시 40세)과 오 사다하루(당시 34세)가 도쿄에서 홈런 대결을 벌여 에런이 10개로 9개의 오 사다하루를 제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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