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얼 톡] 성우가 꿈이었던 나, 시각장애인 위한 요리 레시피를 녹음했다

조은·변호사 입력 2021. 1. 25. 03:03 수정 2021. 1. 25.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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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거야?” 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2021년이 되어 갓 6년차 변호사가 된 지금을 기준으로 답변하자면, 변호사는 말하는 일을 한다. ‘변호(辯護)’라는 단어 자체가 ‘말[言]’을 포함하고 있는 만큼, 변호사는 말을 잘 해야 한다. 의뢰인이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재판부를 설득하려면, 이른바 ‘말발’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말을 잘하는 사람은 없다. 특히나 필자는 어린 시절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무척 두려워하는 소심한 아이였다. 수업시간에는 혹시 선생님이 발표를 시키실까 무서워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부모님은 필자의 손을 이끌고 동네의 ‘큰 뜻’ 학원(웅변 학원이었다)에 데려가셨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따뜻한 선생님의 가르침 덕에 1년 후 이 연사는 소리 내어 외칠 수 있게 되었다. 손을 들고 발표하는 것이 쉬워졌고, 동화구연이나 웅변 대회에서 상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중고등학교에서는 방송부 아나운서 활동을 하면서 원 없이 말을 했다. 숙련된 수다쟁이로 거듭난 것이다.

이렇게 갈고 닦은 말하기 능력을 변호에 사용하리라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다. 사실 필자가 꿈꿨던 장래희망 중 하나는 ‘성우’였다(본디 장래희망이란 계속해서 바뀌고, 실현 가능성이 낮은 것을 그 특성으로 한다). 얼굴을 숨긴 채 목소리만 바꿔 가며 다양한 캐릭터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지원자에게는 큰 장애물이었다. 성우는, 여러 명을 뽑지 않는 직업이었다.

결국 지금은 다른 방향으로 말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다만 변호사의 말하기는 내용상 즐겁지 못한 경우가 많다. 기본적으로 법률 분쟁에서 상대방의 말은 틀리고 우리 말이 맞다고 설득하는 과정이므로, 논리적이어야 하는 것은 물론 감정적으로도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에너지가 고갈되는 연말쯤이면, 다행히 법원도 휴정기를 가진다. 많은 변호사들이 휴정기에 맞추어 휴가를 보내기에, 필자 또한 하루하루가 소중했다. 어떻게 보내야 좋을지 고민하다가, 올 겨울에는 조금 특별한 말하기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바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녹음봉사 활동에 참여하는 것! 주제는 요리였다. 집에서 직접 간단한 요리를 하면서 재료와 조리 과정을 자유롭게 설명하고, 이를 녹음해서 보내는 방식이었다. 말하는 부분은 자신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요리가 마음에 걸렸다. 35년 경력의 전문가 어머니께 SOS를 청했다(법률 상담과 요리는 전문가를 찾아가는 것이 좋다).

고심 끝에 정한 메뉴는 ‘만두 케사디아’. 냉장고에 흔히 방치되어 있는 냉동 만두를 으깨어 토르티야 위에 올리고, 모차렐라 치즈를 뿌려 반으로 접은 후 프라이팬에 노릇노릇 구워 내는 간단한 요리였다. 녹음기를 켜고, 말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조은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조은 엄마입니다.” “오늘은 만두 케사디아를 같이 만들어 볼 건데요! 사실은 저희도 처음 해보는 겁니다.” 생각치 못한 부분에서 웃음이 터지거나, 아버지가 예상보다 일찍 들어오시는 바람에 녹음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덕분에 “호떡인데 고기가 들어있네요”라는 아버지 시식평까지 담는 것으로 녹음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완성된 녹음본은 점자도서관 및 장애인복지관에 전달되었다고 한다. 필자로서는 부족하지만 못다 이룬 성우의 꿈을 실현해 보는 뜻깊은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코로나로 휴가 내내 비자발적 집캉스를 하게 되어 아쉬웠는데, 집에서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 나누는 것이 더없는 행복임을 알게 되었다. 추운 겨울, 말 한 마디마다 필자가 느낀 따뜻한 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졌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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