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쏘아올린 美 스파이 위성, 네팔 호수 사라질 위기 알렸다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2021. 1. 2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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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완의 사이언스카페]
중국·소련 핵무기 감시하던 美 CIA 정찰위성 사진
1995년 기밀 해제, 사진 비교로 네팔 페와 호수 변화 알게 돼
동·식물 생태 연구 한몫… 미래 재앙 막을 ‘타임머신’ 기대

먼 옛날 거지가 한 마을을 찾았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 구걸을 했지만 사람들은 모두 남루한 차림을 보고 욕을 하며 쫓아버렸다. 단 한 곳, 마을에서 가장 험한 곳에 사는 가난한 노부부는 달랐다. 자신들도 형편이 어렵지만 노부부는 정성을 다해 거지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허겁지겁 식사를 마친 거지는 노부부에게 마을에 곧 재앙이 닥칠 테니 산으로 몸을 피하라고 했다. 노부부가 거지의 말대로 급히 산등성이로 올랐다. 뒤를 돌아보니 히말라야 산에서 쏟아진 물에 마을이 잠기고 그 자리에 거대한 호수가 생겼다. 노부부는 자신들이 대접한 거지가 바로 파괴의 신인 시바임을 깨닫고 호수 한가운데 섬에 사원을 세웠다.

/그래픽=양인성

전설에 나온 호수는 네팔에서 둘째로 큰 페와 호수이다. 해발 742m에 있는 이 호수는 안나푸르나 등 히말라야의 설산(雪山)에서 눈이 녹은 물로 형성됐다. 네팔에서 둘째로 큰 포카라 시에 사는 약 27만 명이 이 호수에서 전기를 얻고, 농업과 어업, 관광 산업으로 먹고산다.

최근 이곳 사람들에게 다시 파괴의 신이 경고를 보냈다. 110년 안에 호수 물이 말라버린다는 것이다. 이번 경고는 과학자들이 먼저 알아챘다. 그들에게는 시바의 의중을 파악할 새로운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냉전시대에 활약한 미국의 스파이 위성인 ‘코로나’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1959년 6월부터 1972년 5월까지 코로나 정찰위성으로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있는 옛소련과 중국의 핵무기 시설들을 감시했다. 코로나 위성이 지상을 촬영하고 필름을 고도 160㎞에서 투하하면 하와이에서 이륙한 공군기가 공중에서 낚아챘다. 코로나 위성은 90만 장 가까운 위성사진으로 비밀 미사일 기지와 해군 기지들을 찾아냈다.

코로나 위성사진은 1995년 기밀이 해제됐다. 과학자들은 코로나 위성사진이 지구 생태 변화를 추적할 일종의 타임머신과 같다고 반겼다. 과학 연구에 이용하는 위성사진은 코로나 위성보다 한참 뒤에 나왔거나 해상도가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기밀 해제 당시 고어 미 부통령은 “지구의 변화 과정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흥분할 사진들”이라고 평가했다.

과학자들이 타임머신이라고 부른 것은 과거와 현재 모습을 비교해 미래까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 리즈대의 스콧 왓슨 교수는 2019년 2월 국제 학술지 ‘원격 탐사’에 코로나 위성이 찍은 페와 호수 사진을 최근 다른 위성이 찍은 사진과 비교한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진은 위성사진을 분석해 호수의 삼각주가 6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크게 확장됐음을 알아냈다. 도로 건설로 산사태가 빈번해지고 퇴적층이 늘면서 호수 면적이 갈수록 줄었다. 현재 추세라면 이르면 110년 안에 페와 호수의 퇴적층이 늘면서 담수가 80%까지 사라질 수 있다고 연구진은 예측했다.

중앙아시아 초원에 사는 설치류인 만주마멋도 코로나 위성 덕분에 자신들이 처한 위기를 세상에 알릴 수 있었다. 독일 훔볼트대의 카타리나 먼티누 교수는 지난해 5월 ‘왕립학회보 B’에 중앙아시아에 농업이 발전하면서 마멋의 개체수가 크게 감소한 증거를 찾았다고 밝혔다. 바로 코로나 위성사진이다.

마멋은 다른 동물과 달리 조상이 지은 굴을 대대로 이어받는다. 마멋의 수명은 6년인데, 8세대가 지난 50년 넘게 같은 굴을 사용한 경우도 있다. 마멋은 굴이 무너지면 떠나지 않고 보수한다. 그로 인해 에너지를 소비해 다른 동료보다 후손을 남기기 어려워진다.

1960년대 소련이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를 대규모 농장으로 개간하면서 마멋의 굴이 큰 피해를 봤다. 연구진은 1968년 코로나 위성사진에서 마멋의 굴 5000여 개를 발견했다. 이를 2017년 다른 위성이 찍은 사진과 비교했더니 초원에서 농지로 변한 곳은 마멋 굴의 약 60%가 사라졌음을 확인했다. 먼티누 교수는 언론 인터뷰에서 “스파이 위성의 자료는 흑백판 구글 어스와 같다”며 “비버가 개울에 짓는 댐이나, 초원의 흰개미 집, 플라밍고나 펠리컨 군집 변화처럼 생물다양성의 역사적 추이를 더욱 넓게 연구하는 데 쓸 수 있다”고 말했다.

냉전시대 감시 대상이었던 중국도 코로나 위성의 덕을 보고 있다. 광둥성의 잔장시에는 맹그로브 국립보호구역이 있다. 맹그로브는 열대·아열대 갯벌이나 하구에서 숲을 이루는 나무로, 다른 나무보다 온실가스 흡수량이 월등하다. 다양한 멸종위기 동물들이 서식하는 터전이기도 하지만 최근 지구온난화와 급격한 개발로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 영국 큐 식물원의 케빈 림포엘 박사 연구진은 지난 2013년 잔장의 맹그로브 숲 역시 40년 만에 3분의 1 이상 사라졌다고 발표했다.

연구진은 1967년의 코로나 위성사진을 2009년 촬영한 다른 위성사진과 비교해 이 같은 결론을 얻었다. 림포엘 박사는 최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생태 연구 자료는 모두 빨라야 1980~1990년대 이후에 생성됐다”고 연구의 한계를 말했다. 이 자료를 현재와 비교해봤자 큰 변화를 알아내기 힘들다. 하지만 코로나 위성이 연구 시간을 20~30년 더 확장한 덕분에 확실한 변화상을 포착한 것이다.

미국에서 지금까지 기밀이 해제된 스파이 위성사진은 180만 장이 넘는다고 한다. 이 중 5%인 9만 장 정도만 스캔돼 연구에 활용됐다. 예전엔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지 않아 일일이 필름을 현상해 사진을 뽑느라 비용이 많이 든 점도 스파이 위성사진의 활용을 막았다. 이제는 디지털화에 이어 사진 왜곡 보정과 인공지능을 이용한 분석 기술까지 발전하면서 위성사진의 활용도가 급증하고 있다.

네팔의 페와 호수가 바닥을 드러내면 주민들에게 엄청난 재앙이 닥친다. 과거 시바신을 박대한 사람들은 손도 쓰지 못하고 물에 잠겼지만, 다행히도 지금은 아직 시간 여유가 있다. 모두가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호수 수자원 보호에 필요한 행동을 한다면 새로운 희망이 생길 것이다. 냉전시대 음지(陰地)에서 활약한 스파이 위성이 과학 연구에 새로운 빛을 밝혀 미래까지 바꾸는 타임머신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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