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의 꽃이야기] 김초엽은 왜 주인공 이름을 릴리·데이지라 했을까

김민철 논설위원 2021. 1. 25.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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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SF소설집이다. 그런데도 인간 내면을 다양한 각도에서 깊이 있게 응시하는 것이 참 좋았다. 1993년생 젊은 작가가 어쩌면 이렇게 ‘웅숭깊은 시선’으로 글을 쓸까 감탄하며 읽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꽃이 나오는지 찾아보았다. 아쉽게도 꽃이 주요 소재 또는 상징으로 나온 소설은 찾지 못했다. 젊은 사람들은 스스로가 꽃이라 그런지 꽃에 관심이 많지 않다. 이건 젊은 작가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어쩌다 젊은 작가 소설에서 주요 소재 또는 상징으로 쓴 꽃이 나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소설집의 첫번째 단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주인공들은 이름이 꽃이다. 과거의 주인공 릴리, 현재의 주인공 데이지 모두 예쁜 꽃이름이다.

이 소설에서 릴리는 인간 배아를 맞춤 디자인해주는 유전자 해커다. 릴리의 부모는 유전병으로 릴리 얼굴에 얼룩을 남겼다. 이 때문에 릴리는 유전적 결함이 없는 인간을 만드는 일은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릴리는 40세에 이르러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었다. 자신의 클론 배아를 아름다움, 지성, 매력 등을 모두 갖춘 배아로 제작했지만 나중에야 자신이 가진 유전병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배아를 폐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릴리는 이 배아를 폐기하는 것은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릴리는 이 아이에게 장애에 대한 편견이 없는 세상을 주고자 지구 밖에 ‘마을’을 만들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서로의 결점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장애에 대한 인식과 편견이 없는 마을이면 그걸로 충분한 것일까. 이렇게 한걸음 더 나아가는데 이 소설의 미덕이 있다.

이 마을에는 18세에 일종의 성년식으로 ‘시초지’ 지구로 1년 동안 순례를 떠나는 관습이 있다. 그런데 순례자 중 일부는 항상 마을로 돌아오지 않고 지구에 남았다. 마을의 소녀 데이지가 이에 의구심을 품고 그 이유와 릴리 이야기를 추적하는 것이 이 소설의 줄거리다.

김초엽은 왜 소설 주인공 이름을 릴리·데이지라 했을까. 두 주인공 이름으로 꽃을 쓴 것은 작가가 일부러 그런 것이라 믿는다. 소설에 더 꽃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곳곳에 ‘추위에 움츠려 있던 꽃들이 때마침 활짝 피어났어’ ‘(문지기는) 지구에 가면 그 무덤 앞에 꽃을 놓아달라고도 말했지’ 같은 문장으로 보아 작가가 꽃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고보니 김초엽(金草葉)이라는 이름도 ‘풀잎’을 뜻하는 예쁜 이름이다.

릴리는 백합인데, 나팔꽃처럼 생긴 꽃이 6개로 갈라지고 향기가 진하다. 흔히 백합이라는 이름 때문에 ‘백합은 하얀꽃’이라고 생각하는데, 백합의 ‘백’자는 흰백(白)자가 아니고 일백백(百)자다. 백합과 나리는 원래 같은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 인식이 변하면서 향기가 진한 원예종만을 백합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아졌다.

백합. /사진=농촌진흥청

원예종 백합은 꽃집에서나 볼 수 있지만, 산이나 화단에서 더 예쁜 자생 나리들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참나리다. 7~8월 꽃에 검은빛이 도는 자주색 반점이 많아 호랑무늬를 이루고, 잎 밑부분마다 까만 구슬(주아)이 주렁주렁 달리는 것이 특징이다.

참나리.

데이지(Daisy)는 유럽 원산인 관상용으로 널리 가꾸는 여러해살이꽃이다. 꽃은 봄부터 가을까지 흰색, 연한 홍색, 홍색 등으로 피고, 뿌리에서 나오는 잎은 달걀을 거꾸로 세운 듯한 주걱 모양이다. 데이지 하면 흔히 잉글리시데이지를 가리킨다.

데이지.

소설집에 있는 다른 소설 ‘관내분실’도 가슴 뭉클하게 읽었다. 죽은 자들의 마인드를 보관하는 도서관을 상상하는 내용이다. 유족들은 도서관에 와서 망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엄마의 인덱스가 지워져 ‘관내분실’ 상태에 빠지자, 화자가 엄마 마인드를 다시 불러오기 위해 생전 흔적을 더듬고 결국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엄마와 화해하는 내용이다. 2017년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부문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웜홀 통로를 통한 항법 개념을 바탕으로 우주 항공 시대 여성 기술자가 겪는 가족과의 이별을 다루었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한 여성 우주비행사가 발사 직전 우주로 가지 않고 바다로 뛰어든 이유를 살펴보는 내용이다. 하나같이 한번 읽기 시작하면 놓기 어려운 흡이입력을 가진 소설들이다. 작가가 앞으로 내놓을 소설에서 꽃을 더 많이 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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