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재호 칼럼] 이념적 보수에서 실용적 진보로

2021. 1. 27.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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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가장한 좌우 보수의 이익정치
레토릭 정치와 아마추어 정책 팽배
독선적 좌우 보수 정치 막 내려야
실용적 진보 시대정신이 판 바꿔야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새해가 밝고 대통령선거가 1년 남짓 남았다. 석달 후 치뤄지는 서울·부산 시장 보궐선거도 내년 대선의 전초전처럼 치루어질 모양이다. 지난 4년간 여야 극한대립의 정치공방에 지친 우리는 이제부터 문재인 정부의 공과를 꼼꼼히 분석하고 다음 대선에 임해야 할 것이다.

지나간 세 정권의 전직 대통령들이 탄핵, 투옥, 자살로 끝을 맺으며 국민에게 끼친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라는 분열되고 이성은 실종되고 깃발만 나부끼고 있다. 갈등과 반목의 골은 깊어가고 정치지도자들은 깃발 뒤에 숨어있다. 이념으로 포장된 진영의 집단이익만 챙기느라 상대를 설득하고 타협하며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함께 풀어헤쳐 나아가려는 정치 리더십은 실종되었다.

나락에 빠진 영국 노동당을 재건하기 위해 이념의 틀을 깨고 제 3의 길을 제시한 젊은 토니 블레어 총리, 백묘흑묘 논쟁보다 흰고양이든 검은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실용주의로 중국을 G2의 반열에 오르게 한 덩샤오핑 주석, 동독 출신으로 독일과 EU의 운명을 과단성 있게 이끌어가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실용적 진보는 나라의 미래를 밝힌 지도자의 참 모습이다.

구한말 위정척사 논쟁으로 시시비비만 따지며 근대화의 미래를 한치 앞도 못 보고 나라를 빼앗긴 우리 선조들이 원망스럽다. 양반 세력들의 독선적 수구이념 때문에 실사구시 정신으로 실학을 천명한 다산 정약용이나 북학을 내세운 박제가 같은 실용적 진보주의자가 겪었던 시대의 아픔을 오늘 또 다시 겪어야 하나. 돌이켜보면 근대화를 거부했던 보수 양반들의 이념적 논쟁은 당파적 이익을 지키기 위한 집단 이기주의에 다름 아니었다. 오늘 우리 사회를 피폐화시키고 있는 좌파보수와 우파보수 정치집단의 이기주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좌우 보수 정치집단은 21세기 문명사적 대전환기의 파고가 닥치고 있음에도 미래를 고민하기 보다는 과거지향적 정쟁에 매몰되어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재벌개혁, 검찰개혁 등 적폐를 청산하고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며 출범했다. 국민에게 다가가기 위해 대통령 집무실을 광화문으로 이전하겠다고 했고, 정치적 반대 세력도 끌어안는 화합과 소통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려고 일자리 상황판도 만들었다. 한반도평화 운전자론도 주창하고 환경과 안전, 그리고 여성과 인권도 앞세우겠다고 했다. 공정과 정의도 약속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말뿐인 레토릭 정치와 무책임한 아마추어 정책의 기억만 남아있다.

이전 민주당 정부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김대중 대통령의 금융, 기업, 노동, 공공 4대부분 개혁을 통한 외환위기 극복,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개선과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이라크 파병, 제주해군기지 건설 등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 나라의 미래를 위해 자기 진영의 이념이나 이익보다 실용적 진보로 설득하고 포용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태극기부대와 친문세력으로 대표되는 비민주적이고 독선적인 좌우 보수세력들에게 나라가 볼모잡혀서는 안 된다. 서울과 부산시장 보궐선거도 시민을 위한 정책비전의 대결 없이 후보의 인지도나 정권심판론만을 내세우며 표계산만 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비전이나 철학 없이 레토릭만 있는 정치인, 정책의 구체성 없이 원론만 읊조리는 정치인, 소신없이 눈치 보며 이해득실만 계산하는 정치인, 혹세무민하며 자기 말에 책임지지 않는 정치인들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다.

사이다 발언으로 국민을 현혹하는 정치인의 포퓰리즘도 경계해야 한다. 음식을 먹고 체하면 사이다를 마시라던 옛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체하면 사이다를 마실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약을 먹어야 한다. 사이다는 한 순간 속이 시원할 수는 있어도 근본적 해결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응급처방 포퓰리즘 정책보다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정책을 계발해야 한다. 영업제한으로 눈물짓는 자영업자들을 위해 한 달에 수십조원을 지원하는 법을 만들 것이 아니라 이들이 제한적이지만 정상적으로 영업을 할 수 있는 방역방안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국가재정과 미래세대의 부담을 생각해서라도 현금지원은 최소화하고 방역방안은 극대화하는 것이 정부의 실력이다. 빅데이터 분석 등을 통해 영업행위 때문에 일어날 전염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세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진보적 정책이다. 돈 나누어주는 것은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가장 실력 없는 정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율사들을 앞세워 시비만 가리는 정쟁은 끝내고 ‘삶의 정치(life politics)’로 가야 한다. 이념을 가장한 집단이익 추구보다는 협치를 통한 실용적 접근으로 사회문제를 풀어나갈 진보적 정부가 나와야 한다. 동지애로 뭉친 이익집단인 좌파보수와 우파보수의 시대는 막을 내려야 한다. 다음 대선에서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 좌우 이념적 보수보다 미래지향적 실용적 진보라는 시대정신이 판을 흔들어 승리하면 좋겠다.

염재호 고려대 명예교수·전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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