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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무죄입니까 [편집실에서]

입력 2021. 01. 27.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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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대학교 1학년 때 한 공룡박람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습니다. 공룡 장난감을 파는 일이었습니다. 옆 부스 여학생은 장난감을 곧잘 파는데 저는 한나절이 지나도 몇개 팔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 팔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상품포장지에 인쇄된 ‘NON TOXIC(무독성)’이라는 단어가 보였습니다.

“무독성 장난감입니다. 애들이 입으로 물어도 괜찮아요.”

나름대로 홍보를 한다며 ‘무독성’을 앞세웠습니다. 그때 아이의 손을 잡고 지나가던 한 아저씨가 돌아서며 말했습니다.

“학생, 이거 정말 무독성 맞아? 중국산 저가 장난감인데 무독성일 리가 없잖아?”

“포장지를 보면 ‘무독성’이라고 돼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건 포장지에 쓰여 있는 것이고. 학생 조카가 이 제품을 입으로 빨아도 되느냐고. 자신 있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저도 ‘무독성’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3000원도 안 되는 저가 장난감이 건강을 생각하면 얼마나 했을까요. 비록 포장지에 ‘무독성’이라 표기돼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제가 무독성임을 증명할 수 없는 한 그것을 적극 홍보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제 가족에게 권할 자신은 없었으니까요.

법원이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고 판매한 SK케미칼과 애경 등 기업대표와 책임자 전원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는 소식은 20년 전 이 낡은 기억을 소환해냈습니다. 법원은 옥시제품에 포함됐던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와 달리 SK케미칼의 성분인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MIT)은 폐를 망가뜨린다는 결정적 증거가 없다고 봤습니다. 피해자들은 “우리와 똑같이 6개월을 써보라, 써보고 얘기하자”며 절규하고 있습니다.

법원도 고심했겠지요. 하지만 여러 정황을 보면 너무 보수적으로 판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사망자만 1000여명이 넘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번 판결로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이상한 사건이 돼버렸습니다.

법원이 가해자를 적극적으로 찾으려 했다면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할 수도 있었겠지요. 유치한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무죄를 전제로 무해성을 입증하라며 피고인들에게 문제가 된 가습기 살균제를 온 가족이 1년간 써보라고 했으면 어땠을까요? 피고인들은 그 조건을 받아들였을까요? 아울러 법원에도 같은 물음을 던지고 싶습니다. 법원은 해당 가습기 살균제를 가정과 사무실에서 써도 된다고 법원 가족들에게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을까요? 이와 유사한 질문, 기사가 게재된 한 포털의 댓글에도 달려 있습니다.

내 가족에게 권하지 못하는 것을 남의 가족에게 권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그래도 무죄입니까.

박병률 편집장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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