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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 아버지와 천민 아들의 한이 서린 고개

이완우 입력 2021. 01. 2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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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갯길 이야기] 전북 임실 용은마을 용은치

향토에 한적한 작은 고갯길을 답사하여 전해오는 설화, 역사, 자연 생태의 정보를 이야기로 싣는다. <기자말>

[이완우 기자]

천천히 걸으면 빠르고 빨리 걸으면 느린 것이 고갯길 오르막이다. 고갯길의 오르막 내리막에서 인생길의 리듬을 체험한다. 인적이 끊긴 추억의 고갯길을 나는 혼자 걷고 있다. 아니다 흰 구름과 맑은 바람이 함께 걷고 있구나.

섬진강 상류인 임실군 임실읍 용은(龍隱) 마을에서 신평면 창인리 책평들로 넘어가는 '용은치(龍隱峙)'가 있다. 고개 어귀에서 고갯마루를 넘어 고개 출구까지 거리는 300m 정도로서 10분이면 걸어서 넘을 수 있는 작은 고개다.
 
 용은치 고갯길
ⓒ 이완우
고개 어귀와 고갯마루의 표고 차이는 10m쯤 되어서 고갯길의 경사는 완만하다. 고개라기보다 평범한 비탈길이다. 이 고갯길은 조선시대의 임실현 고지도에도 이름이 어엿하게 표기되어 있다. 이 지역의 교통 거점인 오원역(烏院驛)과 임실현 관아를 연결하는 조선시대 국가 간선 도로로서 통영별로의 중요한 고개였다.

이 고개 어귀의 용은 마을 앞에는 섬진강 상류로 진입하는 임실천이 휘감아 흐른다. 감입곡류하천의 형태로 한 마리의 용이 꿈틀대는 모습이다. 이곳 '용은치(龍隱峙)' 아래의 임실천은 왼쪽으로는 491.4m 높이의 용요산(龍繞山) 산자락이 흘러내려 단애로 멈추어 있고, 오른쪽으로는 361.5m 높이의 용암산(龍巖山) 산자락이 흘러내려 전라선 철도와 19번 국도를 앞에 두고 멈추어 있다.

용요산은 용이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산세이고, 용암산은 용이 머무른 바위산이라고 한다. 이 용요산과 용암산의 사이에 하천에 용은치가 있다. 용암산에서 자란 용 한 마리가 용은치로 내려와 임실천 물속에서 잠룡으로 때를 기다리다가, 이윽고 용요산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국이라고 이야기해도 그럴 듯하다.

고갯길은 고개 양쪽으로 계곡이 펼쳐지고 숲이 무성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곳 '용은치(龍隱峙)'는 고개를 넘는 동안 내내 길 양옆으로 논밭이 펼쳐져 있다. 이 고갯길이 현재는 농로 역할을 한다. 소달구지가 지나가며 워낭소리가 지금도 들릴 듯이 정겨운 논밭 풍경이다.

서자의 한이 서린 '용은치(龍隱峙)' 고갯길
 
▲ 용은치 단애 용은치 단애
ⓒ 이완우
 
'용은치(龍隱峙)' 고갯길에는 조선 시대에 신분제의 벽에 부딪힌 아버지와 아들의 한이 서려 있다. 조선시대 중기에 남원 출신의 정3품 무관직 관리가 있었다. 그에게는 첩 소생의 총명한 아들이 있었다. 그는 아들이 천민이지만 그 재주를 발휘할 수 없음이 안타까워했다. 이 관리는 서자인 자기 아들을 적자로 꾸며 관리로 진출하는 기회를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발각되어 사헌부에서 이 관리를 탄핵하여 파직되었다. 그 관리가 죽은 후에 이 '용은치(龍隱峙)'에 그의 무덤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 고갯길에 양반인 아버지와 천민인 아들이 함께 나란히 걸어가는 장면이 상상된다. 아버지의 무덤 앞에 통곡했을 아들의 한이 느껴진다. 용이 못 된 아들이 이무기가 되어 이 고개에 숨어 있을 것만 같다.

홍길동전에는 호부 호형(呼父 呼兄)을 못하는 서자의 한이 잘 묘사되어 있다. 허균은 조선시대 신분제도에서 적서차별의 모순과 비인간적임을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이 '용은치(龍隱峙)' 고갯길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홍길동전의 작가로 알려진 허균의 시대보다 거의 100년 가까이 앞선 역사적 사실이다.

서자이지만 재능 있는 아들을 적자로 꾸며서 관직에 진출할 기회를 찾으려던 남원 출신의 한 관리의 일화에서 조선 시대 신분제도의 굴레를 어떻게든 넘어보려는 한 아버지의 고뇌를 읽어낼 수 있다. 이 '용은치(龍隱峙)'에 전해 오는 이 이야기가 오래오래 마음에 여운으로 남는다.

섬진강 상류의 보석, 고유 어종 임실납자루
 
▲ 용은치 임실천 용은치 임실천
ⓒ 이완우
 
이 '용은치(龍隱峙)' 고갯길의 바로 아래에 흐르는 임실천은 곧바로 섬진강 본류와 합류한다. 임실천이 합류하는 신평면과 관촌면의 섬진강 상류 수계에는 한국 고유 어종 민물고기인 임실납자루가 서식한다. 임실납자루는 잉어목 잉어과 납자루아목의 어종이다.

크기가 5~6cm로 아담하며 관상용 열대어처럼 납작한 몸통으로 지느러미와 색깔이 참 예쁘다. 강물 속에 살아 움직이는 보석이며, 살아 헤엄치는 고려청자라고 할 만하다. 임실납자루는 서식지가 이곳 임실지역 섬진강 상류에만 한정되어 서식 분포가 협소하고 개체 수도 적어서 멸종위기야생동식물 1급으로 보호되고 있다.

임실납자루는 산란관이 매우 길다. 납자루는 강바닥의 모래나 진흙 바닥에 몸을 숨기고 있는 두드럭조개에 알을 낳는 특이한 생태를 보인다. 납자루 암컷은 이 조개의 출수공을 찾아 산란을 한다. 이 두드럭조개도 멸종위기야생동식물 1급으로 보호종이며 개체수가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두드럭조개의 유생(幼生)은 납자루와 같은 소형 어류의 지느러미에 부착하고 기생하여 유패(幼貝)로 성장한다. 연체동물인 두드럭조개와 수중 척추동물 어류인 납자루가 상대방을 자기 종(種)의 새끼를 안전하게 기르는 숙주로 활용한다.

최근에는 임실납자루의 인공 증식에 성공했다. 2020년 가을에는 관촌면 섬진강 상류에서 임실납자루 치어 방류 행사가 있었다. 멸종 위기의 임실납자루가 이곳 섬진강 상류에서 자연 생태계 복원의 살아나는 지표가 되면 좋겠다. '용은치(龍隱峙)' 고갯길에 숨은 용의 이야기와 강물 속에 헤엄치는 보석이며 고려청자 같은 임실납자루의 이야기가 섬진강 상류에서 서로 잘 어울리며 전개된다.

인적이 끊긴 고갯길을 걸으면 뜻밖의 전래 설화와 역사를 만날 수 있다. 고개를 넘으며 맑은 바람과 흰 구름을 배경으로 청정한 자연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어화 좋다 어화 좋아! 고갯길을 찾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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