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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포럼] 역지사지 정치

김기동 입력 2021. 01. 27.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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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 취임사 키워드 '통합'
4년 전, 文 대통령과 대동소이
현실은 딴판, 분열·대립만 난무
상대방 배려하는 마음 아쉬워

지난주 조 바이든이 미국의 제46대 대통령에 올랐다. ‘코로나19’라는 변수를 감안하더라도 초유의 폭도 난입 사태로 이라크 파병군보다 많은 2만5000명의 주 방위군이 워싱턴DC 의회 의사당을 둘러싼 모습은 진풍경이었다. 민주주의 상징에서 졸지에 분열의 아이콘으로 전락한 의사당에서 그가 행한 취임연설의 키워드는 아이러니하게도 ‘통합’이었다. 취임사를 꼼꼼히 뜯어보면 한결같이 화해·포용의 정신과 맥이 닿아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나를 지지한 사람만이 아닌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을 포함해 모든 미국인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4년 전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식 연설과 오버랩됐다. 문 대통령 역시 “저를 지지하지 않은 국민 한 분 한 분도 저의 국민,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다”고 했다. 마치 바이든이 문 대통령 취임사를 ‘복붙’한 것으로 착각할 정도다. 문 대통령은 “2017년 5월10일은 진정한 국민통합이 시작된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퇴근길 시장에 들러 시민과 격의없는 대화를 하겠다는 말도, 광화문 광장에서 갖겠다던 대토론회도 온데간데없다.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나누겠다는 약속은 임기 후반기로 치달을수록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모습으로 변질됐다. 권력기관을 정치로부터 독립시키겠다는 약속은 거대여당의 입법폭주 속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라는 공룡기관을 탄생시키는 걸로 귀결되는 모양새다. 야당을 국정운영의 동반자로 삼아 대화를 정례화하고 수시로 만나겠다는 다짐, 분열의 정치와 보수·진보의 갈등을 끝내겠다는 약속은 어떤가. ‘내편’이 아니면 모두 ‘적’으로 간주하는 편가르기 정치, 말로 표현하기 힘든 대립과 비방만이 여의도 상공을 공허하게 맴돌 뿐이다.
김기동 논설위원
이 지경까지 온 이유가 궁금해졌다. 때마침 바이든 대통령 취임사 가운데 화해·포용이라는 정형화된 단어 말고 필자의 귀를 사로잡은 게 있다. “나의 어머니라면 이렇게 말할 겁니다, ‘잠깐만, 그들의 신을 신고 서봐라’(My mom would say, ‘just for a moment, stand in their shoes’).” 갈라진 미국을 되돌리기 위한 일종의 ‘바이든식 처방’이다. 상대방의 처지나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라는 사자성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영어식 표현이라 정감이 간다. 사람마다 발의 폭과 길이가 다르다. 신어보지 않는 이상 미묘한 착용감을 알 길이 없다. 신는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린다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바이든 정부 내내 이런 국정철학이 얼마나 스며들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묵직하다.

얼마 전 ‘역지사지’란 단어가 정치권에 불려나왔다. “지금은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을 말할 때가 아니다”라는 대통령 신년기자회견 내용에 대해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역지사지하는 자세를 가지라”고 촉구했다. 주 원내대표는 “현직 대통령도 시간이 지나면 전직 대통령이 된다. 본인이 사면대상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대통령이나 여당 입장에서 보면 불쾌할 수 있다. 하지만 예로부터 상대방의 처지에서,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 건 우리의 미덕이다. 이해득실만 앞세워 잇속만 챙기면 갈등이 불거질 것은 볼보듯 뻔하다.

독일의 사회철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는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정치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적이 필요하고, 그런 만큼 적을 이해하고 아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의점을 찾아가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면 더더욱 적을 궤멸 대상으로 봐서는 안 된다.

현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건 각종 경제지표와 통계수치만 봐도 알 수 있다. 경제가 휘청대고, 나라 곳간이 텅텅 비어가는데도 ‘이상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니 한심할 따름이다. 일자리가 사라지는데도 “차츰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우기며 국정 폭주를 이어간다. 남의 말을 당최 듣지 않는 것은 가히 정치신공 수준이다. 이제라도 국정 책임자들은 ‘남 탓’보다는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김기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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