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중앙일보

[이상언의 시시각각] 당연하지 않은 출국금지

이상언 입력 2021. 01. 28. 00:31 수정 2021. 01. 28. 06:28

기사 도구 모음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 중에서
한국처럼 출금 남발되는 곳 없어
임의 구속처럼 결국은 정비될 일
이상언 논설위원

“한국처럼 유효한 여권을 들고 있는데도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수사기관이나 행정기관이 요청했다는 이유로 출국이 막히는 나라가 별로 없습니다. 정상적인 민주국가 중에선 우리 같은 곳을 찾기 어려울 겁니다.” 석동현(전 서울동부지검장) 변호사의 말은 이렇게 이어졌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건은 법적 절차를 무시한 것이니 변명의 여지가 없는 관련자들의 잘못이지만, 이참에 한국의 출국금지 제도와 관행이 얼마나 후진적인지도 국민이 알기 바랍니다.” 뜨끔했다. 누가 출국금지됐다는 기사를 숱하게 쓰거나 고쳤지만, 고백하건대 제도 자체를 진지하게 살펴본 적은 없었다.

석 변호사는 2대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장이다. 허튼 말이 아닐 게 분명했으나 내친김에 그의 전임자에게도 물어봤다. 초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장은 추규호 현 주교황청 대사다. 외교관으로 미국·일본·영국 등지에서 근무한 이력을 갖고 있다. 로마에 있는 그가 답했다. “제가 경험하거나 아는 범위 안에서는 한국처럼 경찰·검찰·국세청이 요청했다는 이유만으로 출국금지가 쉽게 되는 나라는 없습니다.” 법무부 통계를 역산해 보면 5분에 한 건꼴로 출금이 이뤄진다.

그렇다면 외국과 우리는 어떻게 다른가. 외국에선 범죄 연루자의 국외 도피를 어찌 막는다는 말인가. 답을 잘 정리해 놓은 자료가 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형정원)이 2017년 청와대에 낸 연구용역 보고서 ‘현행 출국금지 제도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이다. ‘출국금지의 방식으로는 ① 원칙적으로 출국금지를 하지 않되 국익에 위해가 되는 경우 예외적으로 출국을 제한하는 나라(미국) ② 출국금지의 방식이 아니라 중대 범죄 등을 이유로 여권 발급을 제한하거나 발급된 여권의 반납·효력정지 등을 하는 국가(호주·일본·캐나다) ③ 범죄수사 대상자에 대한 출국금지를 하는 국가(오스트리아·중국) 등이 있다’(42쪽)고 적혀 있다. 작성자에게 오스트리아가 우리와 비슷한 경우냐고 물었더니 “지금은 유럽연합(EU)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제한이 부분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열거된 국가 중 남는 것은 중국뿐이다.

법무부가 만든 ‘법무·검찰개혁위원회’는 지난해 6월 출국금지 제도 개선을 권고했다. 수사와 관련한 출금 대상자를 피의자로 한정(현재는 피내사자·참고인도 포함)하고, 1년 이상 장기 출금은 별도의 심사 과정을 거치도록 하며, 출금 통지 유예(본인에게 알리지 않는 것)는 1개월 이내로 제한하라는 것이었다. 권고가 효력을 발휘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이 작업을 주도한 김대근 형정원 연구위원도 “법 개정 등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김 연구위원은 “출금 대상자를 ‘범죄수사를 위해 출국이 적당하지 아니하다고 인정되는 사람’으로 규정해 놓은 법조문(출입국관리법 4조 2항)부터 고쳐야 한다. ‘부적당’의 범위가 명확하지 않아 해당자가 예측하기 어렵고 과도한 기본권 침해가 발생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출금에 ‘관대한’ 풍토가 조성된 것에 대해 “출국 허용을 국가가 주는 혜택으로 보는 시각이 오랫동안 존재했고, 검찰·국세청·국가정보원 등 권력기관의 편의주의적 관행에 대한 반성이 없었다”고 말했다. 2013년 대법원은 한 판결에서 ‘조세 미납을 이유로 한 출국금지는 재산을 해외로 도피시켜 강제집행을 곤란하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지 자유를 제한해 심리적 압박을 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고 의견을 밝혔다. 그 뒤 8년이 흘렀는데 체납자 압박용 출금은 계속된다.

강제 임의동행, 영장 없는 구속(긴급구속)이 통용되던 때가 있었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도 그랬다. 그게 응당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 줄어 세상이 변했다. 수상한 사람(피내사자), 곧 수사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사람(김 전 차관의 경우가 해당), 낼 돈 안 낸 사람의 출금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도 언젠가 같은 길을 밟으리라 믿는다. 시간은 대체로 자유와 인권의 편이었다.

이상언 논설위원

Copyrightⓒ중앙일보 All Rights Reserved.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