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조선일보

[차현진의 돈과 세상] [4]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입력 2021. 01. 28. 03:05 수정 2021. 08. 26.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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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우키요에 화가 호쿠사이(葛飾北斎)의 그림 '에도 스루가 초의 미츠이 상점(江戸駿河町三井見世略圖)'. /영국박물관

에도 시대 일본은 폐쇄 사회였다. 유럽의 식민지가 될까 봐 걱정하는 다이묘(大名)들이 주민들에게 ‘우리 식대로 살자’는 최면을 걸고 동태를 감시했다. 서양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지하로 숨었다. 다이묘의 통치 자금은 소수 금융 재벌들한테서 나왔다. 보호와 특혜의 대가였다.

외부와 단절된, 지독한 정경 유착의 구조를 메이지 유신이 깼다. 메이지 정부는 과점 금융 재벌들을 해체하고 서양 은행 제도를 수입했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금융업자를 료가에(兩替), 즉 맞교환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환전 업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중국에서는 금융기관을 첸좡(錢莊), 즉 돈이 쌓여있는 곳이라 불렀다. 여·수신 업무에 초점을 맞췄다. 이처럼 동양에서는 환전이나 여·수신이 금융업의 전부였다.

그런데 서양의 ‘bank’는 좀 달랐다. 동업자들이 매일 아침 모여서 어음과 수표를 교환한 뒤 차액을 정산했다. 지급 결제 업무였다. 그러니까 동양의 금융업은 개인 플레이지만, 서양에서는 팀플레이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bank’를 은행, 즉 ‘은화 업자 일행’이라고 번역했다(당시 일본은 은 본위 제도였다). 무역업자 일행을 양행(洋行)이라 부른 것처럼 일종의 집합명사다.

지급 결제 업무에 초점을 맞춘 ‘은행’이라는 말은 요즘 주목받는 핀테크나 간편 결제가 사업의 본질임을 알린다. 팀플레이와 협업은 은행업의 시작이자 끝이다. 하지만 팀플레이와 협업은 은행에만 중요한 게 아니라 기업에도 중요하다. 40년 전 일본 소니사는 베타맥스라는 특허 기술로 세계 VTR 시장을 독식하려다가 스스로 고립되어 결국 사업을 접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지만,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

우리 정부가 그 교훈을 모른다. 지급 결제에 관한 모든 것은 금융위원회가 혼자 감시해야 한다고 믿는다. 팀플레이와 협업이 핵심인 지급 결제에서조차 독불장군을 꿈꾸는 것이다. ‘우리 식대로 살자’던 에도 시대의 다이묘와 고립주의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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