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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달러화 인물 된 흑인 여성

김태훈 논설위원 입력 2021. 01. 28.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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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는 한 나라의 영웅 전시장이다. 지폐에 등장하는 인물을 주기적으로 바꿔 온 영국이 대표적 사례다. 도안으로 쓰인 인물 면면에서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 ‘오만과 편견’의 작가 제인 오스틴,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파운드화를 장식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국력이 뻗어나가던 시기에 각 분야에서 활약했던 선각자들을 엔화 도안으로 즐겨 쓴다. 19세기 후반 “서양 문물을 배우자”며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2년간 구미 10여국을 누볐던 이와쿠라 도모미를 비롯해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친 후쿠자와 유키치 등이 번갈아 등장했다. 여성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를 5000엔권 인물로 택한 것은 근대화 시기에 이미 여성 문인들이 활약하던 문화 선진국이란 이미지를 국내외에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2024년엔 일본 경제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새로 선보일 예정이다.

▶미국 달러화의 주인공은 단연 대통령들이다. 현재 통용되는 지폐 7종 중 5종이 역대 대통령이다. 20달러 지폐 인물인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은 오바마 정부와 트럼프 정부에서 퇴출과 회생 사이를 오락가락하다가 엊그제 바이든 정부에 의해 최종 퇴출로 결론났다. 유색인종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바이든 정부가 인종차별주의자로 악명 높았던 잭슨 대신 19세기 흑인 여성 인권 운동가 해리엇 터브먼을 쓰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터브먼은 그 암흑 시절 여성의 몸으로 흑인 노예 수백명을 탈출시킨 사람이다.

▶지폐 도안에 한 나라가 이룩한 업적과 지향하는 가치만 담기는 것은 아니다.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도 된다. 영국은 지폐 뒷면에 어떤 인물이 오든 앞면은 국가원수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다. 미국 연방법은 1달러에 새긴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초상을 바꿀 수 없도록 못 박고 있다.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으로 수천만 명을 굶겨죽이고 살해했는데도 모든 위안화 지폐의 전면을 장식하고 있다.

▶우리 지폐에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운 초대 대통령도, 민족을 가난의 질곡에서 구출한 중흥 대통령도 없다. 마라토너 손기정도 없고, 안중근도 없다. 조선시대 인물들뿐이다. 지폐 인물이 정치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어쨌든 우리 지폐에선 한민족이 이룩한 기적의 나라 대한민국의 70년 역사는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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