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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운 소문〉은 어떻게 대중을 사로잡았을까

김선영 입력 2021. 01. 28. 03:33 수정 2021. 03. 22.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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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영웅 서사에서 무엇보다 돋보인 특징은 원톱 영웅의 활약이 아니라 연대의 미덕이었다. 거대한 재난의 시대는 강력한 영웅의 활약보다, 친밀하고 평범한 '영웅들'의 공조를 필요로 한다.
OCN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의 주인공들은 ‘고추장색 추리닝’을 입은 우리 동네 히어로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 미증유의 재난이 지구를 뒤덮은 2020년의 드라마도 부지런히 영웅을 소환했다. 갓과 도포 차림으로 굶주린 좀비들을 막아내는 조선의 세자(〈킹덤〉)에서부터 저주의 능력으로 악귀와 싸우는 소녀 방법사(〈방법〉), 무지갯빛 깔때기형 장난감 칼을 휘둘러 총천연색 젤리 괴물을 퇴치하는 보건교사(〈보건교사 안은영〉), 하루아침에 완전한 괴물이 되어버린 아파트 주민들과 맞서는 ‘반괴물’ 고등학생(〈스위트홈〉)까지, 참으로 다양한 히어로가 활약한 한 해였다.

그리고 2020년의 끝 무렵, 드디어 그들이 나타났다. 최첨단 기술과 개성적인 디자인의 수트 대신 고추장색 폴리에스테르 추리닝을 떨쳐입은 우리 동네 히어로즈, OCN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의 주인공들이다. 평소에는 허름한 국숫집에서 쟁반을 나르다가 어둠의 기운을 감지한 순간 악귀 사냥꾼으로 돌변하는 이들은 현재 방송가에서 가장 뜨거운 주목을 받으며, 2020년 히어로물 열풍이 새해까지 이어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경이로운 소문〉의 시작은 미미했다. 동명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했으나 어디까지나 마니아층에 한정된 이야기였고, 이른바 ‘시청률 보증수표’라 불리는 스타들의 물량 공세도 없었다. 심지어 타이틀롤을 맡은 배우 조병규는 이번이 드라마 첫 주연이다. 실제로 첫 회 시청률도 2%대에 머물렀다. 하지만 반응은 이례적으로 빨랐다. 첫 방송에 대한 호평은 다음 회에서 두 배인 4%대의 시청률로 이어졌고, 이는 방영 내내 줄곧 가파른 상승세를 유지하다가 8회에서 결국 9%대를 달성했다. OCN 드라마 역대 최고 기록을 경신한 수치다.

〈경이로운 소문〉은 어떻게 대중을 사로잡았을까. 먼저 장르적 맥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OCN은 그동안 이른바 ‘미드’ 같은 때깔과 토종 정서의 조화를 추구하는 ‘한국형 장르물’ 전문 채널로 자리매김해왔다. 〈특수사건 전담반 TEN〉 〈보이스〉 〈터널〉 〈라이프 온 마스〉처럼 잔혹한 범죄 스릴러와 〈수사반장〉 식의 휴머니즘이 어우러진 수사물 시리즈, 엑소시즘과 샤머니즘을 결합한 퇴마 스릴러 〈손 더 게스트〉 등이 OCN의 진가를 보여준 대표작이다. 대부분 어둡고 진지한 분위기의 이 같은 대표작들과 달리 경쾌한 활극 스타일을 띤 〈경이로운 소문〉은, 그러나 ‘한국형 장르물’의 진화라는 측면에서 이들 성공작의 계보를 잇는다.

이 작품의 장르는 기존 국내 드라마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슈퍼히어로 팀 서사물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특기를 지닌 능력자들이 협업하는 ‘어벤져스’ 류의 팀 서사물은 사실 제작 규모 면에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국내 드라마 시청자들이 그동안 선호해온 슈퍼히어로들의 이야기는 주로 〈일지매〉 〈전우치〉 〈홍길동〉과 같이 초인적 능력을 지닌 원톱 영웅의 모험담이었다. 그럼에도 〈경이로운 소문〉은 이러한 제약들을 영리하게 돌파한다. 한없이 평범해 보이는 ‘생활 밀착형’ 히어로들의 이야기에 화려한 특수효과는 오히려 어울리지 않았고, 몸값 높은 톱스타 대신 탄탄한 연기력과 개성을 지닌 배우들을 기용한 전략은 주요 캐릭터의 개성이 고루 돋보이게 하고 ‘케미’가 살아나게 하는 데 더 효과적이었다.

시대가 영웅 만드는 서사는 끝났다

〈경이로운 소문〉의 주 내용은 사람들의 영혼을 빼앗고 악행을 저지르는 괴물들과 이를 잡아 지옥으로 보내는 ‘카운터’들의 대결이다. 어린 시절 악귀에게 부모를 잃고 카운터로서의 자질을 각성한 고등학생 소문(조병규), 치유 능력자 추매옥(염혜란), 최강 괴력 소유자 가모탁(유준상), 악귀를 감지하는 인간 레이더 도하나(김세정), 물주 최장물(안석환)이 악귀 사냥꾼으로 활약한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들의 능력이 일대일 대결에 최적화되어 있기보다 하나의 팀을 이룰 때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카운터로 특채될 만큼 비범한 재능을 지닌 소문조차 홀로 있을 때는 자주 위기에 처하고 팀원들의 도움으로 구원받는다.

〈경이로운 소문〉이 강조하는 이 같은 협업의 메시지는, 앞서 언급한 히어로물의 일관된 경향이기도 하다. 최근의 영웅 서사에서 무엇보다 돋보인 특징은 원톱 영웅의 활약이 아니라 연대의 미덕이었다. 가령 〈킹덤〉은 신분제 질서가 공고한 조선을 배경으로 했기에 왕세자, 천민 출신의 착호군, 의녀의 신분 초월 공조가 더욱 빛을 발했다. 〈보건교사 안은영〉에서도 소외된 싱글 여성, 장애인, 억압받는 청소년 등 결핍을 지닌 인물들의 유대가 괴물과의 싸움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

〈스위트홈〉의 메시지는 더 명확하다. 학교폭력 피해자이자 끔찍한 사고로 가족과 이별한 현수(송강), 방화범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악인을 처단하는 살인 청부업자가 된 상욱(이진욱), 고아 출신의 고등학생 은유(고민시), 시한부 환자 길섭(김갑수), 천식을 앓는 간병인 유리(고윤정), 하반신 장애를 지닌 두식(김상호) 등 이 작품의 주요 인물은 대부분이 고립되고 소외된 이들이다. “살아남은 우리는 같이 있어야 됩니다”를 반복하는 아파트 방송처럼, 이들이 괴물과 맞설 유일한 무기는 오직 굳건한 연대뿐이다.

〈경이로운 소문〉에서도 카운터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매옥을 통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메시지가 있다. “절대 혼자 행동해서는 안 된다”라는 그녀의 말은 〈스위트홈〉의 방송 메시지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카운터들의 상호보완적 능력은 악귀들의 힘과 비교할 때 그 가치가 더욱 두드러진다. 악귀는 사람들의 영혼을 많이 흡수할수록 더 큰 힘을 얻는다. 악귀가 약육강식의 무자비한 논리로 혼자 살아남으려 할 때, 카운터들은 정반대편에서 공조와 협업을 통해 사람들을 구한다.

요컨대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은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재난의 시대는 강력한 영웅의 활약보다 친밀하고 평범한 ‘영웅들’의 공조를 필요로 한다. 〈경이로운 소문〉은 이 불안과 위기의 시대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드라마적 화답이다.

김선영 (칼럼니스트)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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