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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의 창과 방패] 함께 분노하고, 함께 목소리 내고

e뉴스팀 입력 2021. 01. 28.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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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서울시립대학교 초빙교수]“누군가는 목소리를 내야하고, 누군가는 분노해야지.” <밤쉘(Bombshell):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에 나오는 대사다. 영화는 직장 내 성폭력을 다룬 실화다. 폭스 뉴스에서 해고된 여성 앵커는 회장을 성희롱 혐의로 제소한다. 변명과 발뺌으로 일관하던 미디어 황제는 결국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는 “여성 앵커는 다리가 생명이다”, “아무도 TV에서 중년 여자가 갱년기 때문에 땀 흘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며 권력형 성 범죄를 일삼았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어렵게 소송을 결심한다. 사건 초기에는 동료 여성조차 외면한다. 미국사회가 그럴진대 한국사회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많은 피해자가 분노 하지만 목소리를 내는 건 다른 문제다. 누구라도 돌아올 유·무형 피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망설임 끝에 목소리를 내도 사회적 편견이 기다리고 있다. 갑을 관계가 분명한 정치권은 한층 폐쇄적이다. 2차, 3차 피해로 이어지는 게 다반사다.

유감스럽게도 박원순 서울시장 사례가 그렇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는 “피해자와 가족에게 사과드리며 국민 여러분께도 송구스럽다”고 했다. 2차 피해에 대해서도 고개를 숙였다. 늦은 사과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민주당은 줄곧 ‘피해 호소인’으로 지칭해 왔다. 피해자 고통을 외면한 사려 깊지 못한 태도다. 이런 문제가 터질 때마다 피해자 중심을 외치지만 현실은 감추고 외면하기 일쑤다.

엊그제는 김종철 정의당 대표가 성 추행 문제로 사퇴했다. 정의당과 진보진영은 수렁에 빠졌다. 장혜영 의원은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켜야했다”며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당에 미칠 파장을 예상하면서도 목소리를 낸 것이다. 성추행 정도를 따지는 건 다른 문제다. 진보진영에 유독 집중되는 성 추문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성인지 감수성이 무디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최근 계속되는 성 범죄는 권력형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지위를 악용한 못된 폐습이다.

2년 전에는 스포츠계가 떠들썩했다. 쇼트트랙 국가대표 심석희와 유도선수 신유용씨가 어렵게 목소리를 냈다. 이들은 고교 시절부터 코치에게 상습적으로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코치와 선수라는 지위를 악용한 권력형 범죄다. 이를 계기로 스포츠계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영화판도 예외는 아니다. 김기덕 감독과 배우 조재현은 중심에 있다. 피해 여성들은 “그들은 밤이 되면 짐승처럼 여배우를 찾아다녔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주에는 탈북 여성 승설향씨 사연이 전파를 탔다. 승씨는 탈북한 장진성 작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또 사학재단 아들에게 성 상납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시청자들은 승씨 주장에 공감하며 분노했다. 의지할 데 없는 탈북 여성을 상대로 성을 착취했다는 점에서 사실이라면 악질적이다. 지위를 악용한 성 폭력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고통스런 흔적을 남긴다. 예상대로 장씨는 법정소송을 예고했다. 어려운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느슨한 처벌과 성교육 부재에서 문제를 찾는 이들이 많다. 올바른 성인식이 갖춰진 뒤라야 처벌도 실효를 거둘 수 있다는 생각이다. 상당 부분 공감한다. 중년 남성 대부분은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한 채 학교를 벗어나 성인이 됐다. 사춘기 또래끼리 주워들은 성지식을 밑천으로 왜곡된 성 인식을 키워온 게 현실이다. 이제라도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는 교육에 온 사회가 나서야 한다.

독일은 성교육에 많은 비중을 할애한다. 성은 인권과 관련된 것이기에 강한 책임감을 갖도록 어린 시절부터 교육한다. 이를 통해 억눌리고 뒤틀린 성의식을 배제한다. 어쩌면 우리사회에서 중년 남성들 성의식은 유아기에 머물러 있다. 제대로 된 성교육 못지않은 게 공감 게이지를 높이는 일이다. 권력형 성 범죄에 함께 분노하고, 목소리 내고, 공감하는 사회 분위기다.

침묵 속에서 성 범죄는 곰팡이처럼 피어난다. 직장 내 성폭력을 다룬 또 다른 영화 <노스 컨츄리>. 역시 분노하고 목소리를 낸 여성이 있다. 광산 노동자 ‘조시 에임스’는 성희롱과 성폭력에 대항해 광산회사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한다. 단단한 성벽을 무너뜨리기까지 무려 14년이 걸렸다. 이렇게 한 걸음씩 나아간다. 피해자가 내 딸이라도 외면하고 방치할 수 있을지 묻는다.

e뉴스팀 (bodo@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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