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국뽕'의 함정

한겨레 2021. 1. 28.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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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
‘국뽕’ 담론은 정작 중요한 질문은 은폐한다. ‘우리’는 과연 그만큼 동질적인 집단인가? 손흥민과 비티에스는 언제나 ‘우리’에 포함되겠지만 따지고 보면 당신은 우연히 같은 나라에 태어났을 뿐이다. 더구나 손흥민과 비티에스의 성공에 미친 기여도로 따져도 미국이나 말레이시아의 열성팬들이 당신보다 훨씬 도움을 줬을 공산이 크다.

박권일ㅣ사회비평가

자아도취적인 자국 찬양, 즉 ‘국뽕’이 거대한 유행이자 비즈니스 모델이 된 지 오래다. 최근에는 그런 ‘국뽕’을 비판하는 ‘반국뽕’ 콘텐츠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두 유 노 손흥민” “두 유 노 비티에스(BTS)” 등등의 질문을 끝없이 반복하는 한국인을 풍자하는 ‘두 유 노 유니버스’ 시리즈가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기를 끈 것은, ‘국뽕’에 대한 대중의 피로감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그걸로 끝난 게 아니다. ‘정국뽕’과 ‘반국뽕’ 이후 마침내 등장한 것은 ‘합국뽕’이었다. 지나친 ‘국뽕’은 나쁘지만 그렇다고 지나친 자국 폄하도 나쁘다는 식이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의 성취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긍정하자고 역설한다. 공론장에서 펼쳐지는 ‘국뽕의 정·반·합’을 구경하는 내내 이런 의문에 사로잡혔다. ‘아니, 그래서 어쩌라고.’

물론 유튜브 등에서 유통되는 ‘국뽕’ 콘텐츠는 우스꽝스럽다. 논평할 의욕이 생기지 않는 허접한 수준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정국뽕’보다는 ‘반국뽕’이나 ‘합국뽕’ 콘텐츠가 더 그럴싸하다. 그나마 말이 되는 소리를 한다.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국뽕’에 취하든, 그것을 조롱하든, 균형을 잡든 어차피 이 모두가 ‘국뽕 코인’의 일종일 뿐이다. 언젠가 철학자 슬라보이 지제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유태인은 탐욕스럽다’는 말에 대해 ‘모든 유태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라고 답하면 안 된다. 그 말에 대한 올바른 답은 ‘유태인은 그것과 무관하다’이다.” 개인의 특성은 그의 국적으로 환원될 수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국뽕’이 끝없이 소환되는 이유는 뭘까? 표면적인 이유는 단순하다. ‘국뽕’ 콘텐츠가 대중의 관심을 끌고 그 관심은 돈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럼 왜 애초에 관심을 가지게 됐을까? 다시 이렇게 바꿔 질문할 수도 있다. 왜 사람들은 여러가지 정체성 중 특별히 국가(민족) 정체성에 과하게 몰입하는가? 몇몇 학자들은 애국심이라는 오래되고 강렬한 감정을 인간이 오랫동안 집단생활을 하며 진화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습성이라고 설명한다. 내집단의 정당함을 확신하고 외집단을 배척하는 태도가 개체의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부족 간 살육이 빈번하던 시대의 행동양식을 오늘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는 게 타당한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문명’의 역사는 인류 역사에 비하면 극히 짧은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는 ‘국뽕’이란 형태로 부족 시대를 답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편, ‘국뽕’ 담론에서 인류학적 기원 이상으로 고민해봐야 할 문제는 그것이 향유자에게 제공하는 효능감과 사회적 효과다.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사건에 대한) 일본 현지 반응’을 클릭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마치 정맥주사를 놓은 것처럼 즉각적인 우월감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때로 ‘국뽕’ 콘텐츠는 열패감 내지 열등감을 주기도 하는데, 그것은 미래에 올 ‘진정한 우월감’을 위한 준비단계로서 유의미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정국뽕’ 중독자는 ‘반국뽕’이나 ‘합국뽕’ 또한 열심히 소비하게 된다. 그들에겐 이 모든 것이 쾌락 생산 장치다.

‘국뽕’ 담론은 우월감과 열등감을 자극해 끝없는 논란을 일으키면서도 정작 중요한 질문은 은폐한다. 너무나 당연하게 전제된 ‘우리’는 과연 그만큼 동질적인 집단인가? 손흥민과 비티에스는 언제나 ‘우리’에 포함되겠지만 따지고 보면 당신은 우연히 같은 나라에 태어났을 뿐이다. 더구나 손흥민과 비티에스의 성공에 미친 기여도로 따져도 미국이나 말레이시아의 열성팬들이 당신보다 훨씬 도움을 줬을 공산이 크다. 그런데 왜 당신이 그들의 성공을 자랑스러워하는가? 혹은 이렇게 바꿔 물을 수도 있다. 당신이 태어나기 전 완료됐거나 개입하지 못한 사건들, 예컨대 ‘경술국치’, ‘3·1운동’, 고도경제성장, 민주화 등에 대해 당신이 왜 부끄러워하거나 자랑스러워해야 하는가?

미디어는 ‘국뽕’을 통해 우리를 공감의 공동체로 재현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각자도생의 지옥에서 발버둥 치는 개별자로 고립되어 있다. ‘국뽕’ 담론은 하나됨을 말하지만 그 본질은 위계서열의 논리이며 우승열패의 서사다. 그래서 실제로는 내부의 식민지를 끝없이 만들어낸다. 나는 자신을 누구와, 어떤 집단과 동일시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놓는 순간 우리는 언제든 ‘국뽕’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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