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우리] 北의 공무원 사살 벌써 잊었나

남상훈 2021. 1. 28.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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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 프레임에 갇혀 본질 호도
北도 우리 정부도 책임 회피
유가족, 국가 상대 힘겨운 싸움
국제사회에서 진실 규명 희망

작년 9월 22일 북한군이 서해에서 표류하던 이모씨를 총살하고 유해를 불태운 지 4개월이 넘었다. 북한은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 어느 것도 안 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조용하기만 하다. 사건 당시 해경, 군, 청와대의 직무유기에 대한 책임추궁도 없었다. 들끓었던 여론도 식었고 국민 기억에는 월북 논란만 남았다. 어디서 잘못된 것인가.

시간 끌며 논점을 흐리는 정부의 노회한 전략은 성공했다. 사건 직후 국민적 분노가 고조되자 청와대는 북한이 통일전선부 명의로 보내왔다며 통지문을 읊었다. 사건 당시 북한과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는 변명을 스스로 뒤집는 것이었지만 북한의 ‘사과문’은 여론을 누그러뜨렸다. 그러고는 본질을 흐리고 월북 여부로 관심을 돌렸다. 민주당은 월북을 기정사실화했고 ‘월북자는 죽어도 싸다’는 발언까지 나왔다. 해경 수사는 ‘월북’으로 몰아가기에 급급했다.
이영환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 대표
북한은 해상에서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했고, 우리 당국은 국제상선통신망이나 며칠 후 통전부 통지문이 전달된 남북 핫라인을 통한 구조협조 요청도 안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건을 보고받고도 녹화해서 보낸 유엔총회 연설 방영을 연기하지 않았다.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대통령이 북한에 공개적으로 책임 있는 조치를 요구할 기회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정부·여당은 죽어서 말 없는 이씨를 월북으로 몰아세우는 데에만 혈안이 됐다. 마치 ‘세월호 사건’에서 해운사의 화물 과적이나 정부의 대처를 따지지 않고 단원고 학생들이 왜 비행기 아닌 배를 타고 수학여행을 갔는지 탓하는 것과 같았다.

“코끼리를 떠올리지 말라”고 하면 즉각 코끼리를 연상하는 프레임에 온 국민이 갇히고 말았다. 언론과 시민단체, 변호인, 심지어 유족조차 ‘월북이 아니다’고 반박하는 데에 힘을 뺐다. ‘월북 여부’로 정치권과 국민의 관심이 쏠리며 사건의 본질은 묻혔다. 돌이키기 힘들 만큼 본말이 전도됐다.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싸우는 것은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덩치나 힘의 격차 때문만이 아니다. 결정적 정보는 손쉽게 비밀로 묶어버리는 정부와 프레임 바꾸기에 능숙한 정치 9단들에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기관의 힘을 빌려 싸워야 하지만 청와대까지 포함된 정부의 잘잘못을 따져줄 독립적인 국가기관은 찾기 어렵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아니다. 2019년 11월 탈북어민 2인의 강제송환조차 국가기관들의 비협조로 조사가 불가능하다는 황당한 이유로 진정을 각하했다. 5개년 행동전략에서는 북한의 ‘북한인권법 폐지’ 요구를 유엔 권고로 둔갑시키고 이씨 피살사건이 ‘북한정권에 대한 공격으로 활용될 우려’까지 했다. 파리 원칙에 따른 독립된 국가인권기관으로 보기 어렵다.

법원은 독립성이 있지만 먼저 움직일 수는 없으므로 남는 것은 검찰이다. 세월호 사건에서 담당 검사들이 여론의 힘을 받아 대대적 수사에 나선 전례가 있다. 이씨 피살사건도 형사고소나 고발로 검찰 수사로 갔다면, 4개월 전 윤석열 검찰총장은 국민적 관심이 쏠린 사건에 검찰 자존심을 걸고 나섰을 것이다. 그랬다면 해경은 직무유기 혐의로 검찰 수사대상이 됐고, 해경의 ‘셀프 수사’로 ‘월북’으로 몰아가는 프레이밍을 벌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권력이 두려워하는 것은 여론이지만, 여론과 뉴스 사이클은 오래가지 않는다. 유족이 기자회견을 수백번 해도 제도적 뒷받침이 없으면 관심 이탈을 오히려 재촉할 수 있다. 유족 아닌 사람들의 공짜 홍보로 끝나기 십상이다.

이씨 피살사건의 골든아워는 안타깝게 지났지만, 다행히 유엔과 영국 의회 등 국제사회에서 희망이 보인다. 미국 의회에서 대북전단금지법 청문회가 열리면 의제로 올려야 한다. 토마스 킨타나 유엔 북한인권 특별보고관은 남북한 정부가 책임 있는 조치를 할 때까지 줄기차게 이 사건을 언급해야 한다.

이영환 전환기정의워킹그룹(TJWG)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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