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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엽의고전나들이] '나중에'의 으름장

남상훈 입력 2021. 01. 28.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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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시간의 예술이다." 그런 말을 떠벌리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남자들의 흔한 허풍은 거의 다 시간에서 나오는 것 같다.

그것이 바로 50의 중년이 20년 뒤를 기약하며 내뱉는 허풍이 힘을 못 쓰는 이유이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볼모로 잡아 세운 계획들이 '예술'이 아니라 '허풍'이 되고 마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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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시간의 예술이다.” 그런 말을 떠벌리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남자들의 흔한 허풍은 거의 다 시간에서 나오는 것 같다. 백수 청년이 20년 뒤면 재벌이 될 거라며 큰소리칠 수 있는 것은 앞날이 창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과 더불어, 지금은 미미하나 나중에는 창대하리라는 주문의 효력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그것이 바로 50의 중년이 20년 뒤를 기약하며 내뱉는 허풍이 힘을 못 쓰는 이유이다.

그런데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볼모로 잡아 세운 계획들이 ‘예술’이 아니라 ‘허풍’이 되고 마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재벌은 온 나라에서 손에 꼽는 부자인데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이 덤벼드니 다 될 리가 없고, 세계를 호령하는 톱스타는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데 연예인 지망생은 매년 수십만 명을 넘으니 다 그리될 수는 없다. 쏟아놓은 허풍에 민망해지는 게 당연한데 이 때문에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차라리 누구나 다 가질 만한 것을 찾아 나선다면 허풍이 아니라 예술에 가깝지 않을까?

주변을 둘러보면 금세 과로사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애를 쓰는 이들이 많다. 이유를 물어보면 그 대답이 한결같다. 그렇게라도 해야 노후를 조금 더 편하게 보낼 수 있단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것을 보면 보통사람의 평균치가 아니라 두세 배는 족히 넘을 듯하니 신기하다. 불현듯 홍만종(洪萬鍾)의 읊조림이 생각난다. “살면서 넉넉하길 기다리지만 어느 때나 넉넉해질까. 늙기 전에 한가함을 얻어야 그게 진짜 한가함이네.”(‘순오지’(旬五志))

기운을 소진한 후 남는 한가함이라면 한가함이 아니다. 나중에 넉넉하길 바라느라 오늘은 그저 긁어모으는 데만 기운을 쏟는다면 딱한 일이다. 노후의 불행을 막는다는 미명하에, 튼튼한 다리와 멀쩡한 두 눈을 일터에만 묶어둘 이유는 없다. 머리를 들어 하늘의 달을 보며 오래전 사두었던 책을 읽는 정도의 일이라면 지금 당장, 오늘 저녁에 하는 게 맞다.

어쩌면 정말 무서운 건 노후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나중에’의 으름장인지도 모르겠다. 이 녀석은 어찌나 민첩한지 아무리 바짝 쫓아도 좀처럼 붙잡히질 않고 또 저만치 가서는 또 겁을 준다.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돈이 아니라 한가함이라면, 오늘 저녁만이라도 아무 생각 없이 한번 한가해 보는 게 어떨까 싶다. 재벌이나 톱스타도 부러워할 그런 한가함 말이다.

이강엽 대구교대 교수·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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