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김정은 만나기도 전인데..'北원전 문건' 미스터리

유지혜 2021. 1. 29.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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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통상자원부의 ‘북한지역 원전 건설 추진방안’ 문건은 만든 배경도 석연치 않지만 삭제한 경위 역시 궁금증을 자아낸다. 감사원의 감사 대상인 월성 원전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산업부 역시 사안의 민감성을 잘 알고 있었다는 방증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세종청사 산업통상자원부 원전산업정책관실 앞 복도 모습. [뉴스1]

실제 북한에 원자력발전소를 지어준다는 구상은 국제 비확산 체제 측면에서 보면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측면이 많다.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고 자위적 수단으로 이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위협하는 북한에 핵연료를 제공하는 게 될 수 있어서다. 북한은 이달 열린 8차 노동당 대회에서는 아예 핵잠수함 건조를 공식화하기도 했다.

따라서 겹겹이 현실적 제약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는 물론이고, 미국의 독자 제재 역시 원자력 발전에 사용될 수 있는 물질이나 부품의 대북 반입은 금지하고 있다.

또 산업부가 한국의 기술과 장비 등으로 북한에 원전을 건설할 계획이었다면, 이는 한ㆍ미 원자력협정의 적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협정에 따라 미국이 한국에 이전한 핵물질, 감속재물질 등은 한ㆍ미가 합의할 경우에만 제3국으로 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어길 경우 이미 이전된 핵물질이나 장비, 이를 이용해 생산한 특수핵분열성물질을 반환하도록 하는 근거 규정도 뒀다. 결국 어떤 경우에도 미국과의 합의가 우선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들이 2019년 12월 감사원 감사 직전 삭제한 530개 파일 목록 중 '北 원전건설추진 문건' 관련 파일. 보고서 캡쳐

물론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이를 대북 인센티브로 고려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이는 로드맵의 거의 최종단계에서 제공할 보상으로 볼 수 있다. 우선 비핵화의 최종목표와 로드맵부터 합의해야 하는데, 북한이 이를 거부하면서 2019년 2월 하노이 북ㆍ미 정상회담은 '노 딜'로 끝났다.

또 이 과정에서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는 필수다. 이에 따라 핵시설 신고, 핵물질 목록 작성 및 사찰단 복귀 등이 이뤄져야 한다. 북한뿐 아니라 모든 나라가 원자력 발전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관련 규정을 따라야 한다. 이미 핵무기화에 성공한 북한의 경우 더 엄격하고 전면적인 사찰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고명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원전은 민감 물자이기도 하고 국제적 수출 통제 체제가 있어서 그런 기준을 다 준수하며 건설하는 건 매우 복잡한 문제”라며 “사실 이런 대북 지원 로드맵을 만드는 것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지만, 지금의 비확산 체제를 우회하거나 독자적으로 추진할 생각이었다면 엄청난 국제적 반대에 부딪힐 사안”이라고 말했다.

산업부가 북한 원전 건설 추진 방안을 검토하며 이런 부분까지 고려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삭제된 문건 중 전문가 목록과 일부 이력서까지 있었던 것을 보면 자문단 구성 등을 위한 상부 결재를 염두에 두고 구체적으로 이를 작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문서가 작성된 것은 2018년 5월 초ㆍ중순으로, 아직 1차 북ㆍ미 정상회담 의제 조율 등을 위한 실무회담도 시작되지 않았을 때다. 이에 정부 내에서조차 산업부가 이런 문건을 당시 만든 배경을 갸우뚱하는 이들이 많다.

남북정상회담이열린 2018년 4월27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함께 군사분계선(MDL)을 북측으로 넘어가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정부 핵심 관계자는 “이런 제목의 문서 자체를 처음 본다. 이때는 우리가 미국과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그에 맞는 상응조치를 어떻게 구성할지 패키지를 짜고 있을 단계였는데, 어떻게 북한에 원전을 지어주자는 구상을 제안했겠느냐”며 “남북 간에나 북미 간에 논의된 적은 없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통일부 관계자도 “4ㆍ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당시 북측에 건넨 한반도 신경제 구상에는 원전 관련 내용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외교 소식통은 “북한은 제네바 합의로 경수로를 지원받을 때만 해도 공식적으로 전력난 해소를 위한 원자력 발전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니 아예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지금에 와서는 원전 제공이 북한에 큰 인센티브가 될 지도 의문”이라고 말했다.

4ㆍ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전후 조성된 평화 분위기를 반영, 산업부가 독자적으로 지원책을 검토하다 감사원이 자료 확보시 외부로 내용이 유출되거나 정부 안팎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관련 문건들을 삭제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국내에서는 경제적 효용성을 문제삼아 원전을 폐기하면서 북한에 원전 건설을 검토하는 것 자체가 자기모순이라는 비판도 의식했을 수 있다.

관련 사정에 밝은 한 민간 인사는 “당시는 각 부처에 기업까지, 남북 경협과 관련된 사안 발굴에 여념이 없을 때였다. 제재나 비확산같은 현실적 제약은 아예 제쳐두고 북한이 호응할 만한 아이디어를 찾는 데 더 집중하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유지혜ㆍ박현주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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