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추악한 '백신민족주의'

장은교 기자 2021. 1. 31.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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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회원국 시민 3배 물량 확보하고도 영국과 '힘겨루기'
'유럽 내 생산 백신 수출금지' 조치했다 비판 잇따르자 번복

[경향신문]

“지난해 9월 세계 정상들은 코로나19 팬데믹 대응을 위한 연대를 강조했고 백신이 개발되면 가장 취약한 계층에게 먼저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 백신이 나왔고 연대는 깨졌다. 유럽연합(EU)과 영국의 싸움은 추악한 백신민족주의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CNN은 30일(현지시간) 아스트라제네카의 코로나19 백신을 둘러싼 EU와 영국의 갈등을 이렇게 전했다. 브렉시트 발효 두 달 만에 EU는 영국을 상대로 영역 싸움을 하고 있다. 회원국 시민들의 3배가 맞을 물량을 계약해놓고도 빠른 공급을 압박하는 EU 집행부의 리더십을 두고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 22일 아스트라제네카가 유럽의 초기 백신 공급이 예정보다 지연될 수 있다고 밝힌 뒤 EU집행위는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EU집행위는 “백신 공급이 지연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며 “원인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아스트라제네카가 EU보다 영국을 우선시하고 있다고 문제 삼기 시작했다. 파스칼 소리오 아스트라제네카 대표가 나서 “영국은 EU보다 석 달 앞서 계약을 체결했다”며 “유럽과의 계약에 언제까지 공급해야 한다는 시한을 명시한 적도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자 스텔라 키라아키데스 EU 보건담당 집행위원은 “선착순은 동네 정육점에서 통할지 몰라도 우리의 사전구매 계약엔 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U집행위는 25일 EU 권역 내에서 생산된 백신의 수출을 막겠다며 백신 이동경로를 추적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또 물량 부족이 사실인지 확인하겠다며 28일 벨기에의 아스트라제네카 공장을 ‘급습’했다. 29일에는 영국에서 생산된 백신이라도 가져와 공급량을 맞추라고 압박했다. 아스트라제네카는 “백신 제조는 오렌지 주스를 만드는 것과 다르다”며 EU의 대응에 유감을 표했다. CNN은 “WHO(세계보건기구)와 전문가들이 두려워했던 추악한 백신민족주의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평등을 자랑으로 여겨온 유럽에서 시작됐다”고 비판했다.

유럽 내 생산 백신 수출금지 조치는 새로운 논란으로 번졌다. EU가 영국으로의 백신 수출을 막으면서, 영국 영토지만 EU의 규제를 받는 북아일랜드가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EU의 조치로 유럽산 백신을 공급받지 못하게 되자 북아일랜드 총리가 나서 EU를 비판했다. 마이클 고브 영국 국무조정실장은 “EU가 백신 부족분을 얻기 위해 하고 있는 노력이 영국의 백신 공급에 영향을 끼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고 밝혔다. 보수당의 톰 투겐트하트 의원은 트위터에 “EU가 영국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분명해졌다”고 썼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도 “EU 때문에 전염병 기간이 더 길어질 수 있다”고 비판했다. 비판이 이어지자 EU 지도부는 결국 30일 결정을 번복했다. 뉴욕타임스는 “갑작스럽고 민망스러운 유턴”이라고 평했다.

EU 지도부의 백신민족주의 행태는 회원국들로부터 받고 있는 정치적 비판을 피하려다 나온 자충수라는 분석도 있다. EU는 집행위가 백신을 받아 우선순위에 따라 각국에 공급하면서 백신 보급은 물론 접종까지 영국이나 미국에 비해 너무 느리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독일과 스페인 등에선 물량 부족으로 백신 접종이 중단되고 있다. EU는 29일에야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승인했다. 독일 언론 슈피겔은 “유럽은 백신재앙에 직면했고, 궁극적으로 이 사태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정치인생의 가장 큰 재앙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장은교 기자 ind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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