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은 왜 한국 선박 선원 석방을 결정했을까?

길윤형 2021. 2. 3.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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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협정 복귀 원하는 이란의 현실적 외교노선과
문제해결 나선 한국의 외교노력이 맞물린 결과
이란 혁명수비대가 1월 4일(현지시각) 중동 산유국의 주요 원유 수송로인 호르무즈해협에서 한국 국적 선박 ‘한국케미호’(1만7426t급)를 나포하는 과정을 찍은 영상을 공개했다. 헬기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영상에는 이란 혁명수비대 소속 소형 고속정이 한국 선박에 가까이 접근하는 장면 등이 담겼다. 파르스(FARS) 뉴스 동영상 갈무리

이란이 지난달 4일 페르시아만 환경 오염을 이유로 억류했던 한국 선박의 선원들을 한 달 만에 ‘전격’ 석방하기로 결정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패권국 미국은 물론 철천지 원수인 이스라엘, 라이벌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대치하며 키워온 이란의 거친 외교 기질을 생각할 때 예상보다 훨씬 조기에 석방이 이뤄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먼저, 이번 석방은 이란의 선제적 결정에 의해 전격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긴장감’은 2일 밤 10시께 공개된 외교부 보도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외교부는 이 자료에서 대이란 협상을 총괄하는 “최종건 제1차관이 오후 6시50분부터 약 30분간 한 달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우리 국적 선박 및 승선 선원들의 조속한 억류해제를 위해 세이에드 압바스 아락치 이란 외교부 차관과 전화통화를 했다”는 사실을 전하며, 아락치 차관이 “선장을 제외한 나머지 선원들에 대한 억류를 우선 해제하기로 결정했음을 ‘알려왔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이 통화가 이뤄진 뒤 곧바로 보도자료를 내지 않고, 몇 시간 시점을 미뤘다. 이란이 실제 석방 결정을 내릴지 100%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외교부는 2일 밤 <로이터> 통신을 통해 관련 사실이 공개되고, 사이드 하티브자데 이란 외교부 대변인이 홈페이지를 통해 석방 사실을 공식화한 뒤 밤 10시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끝까지 돌다리를 두드린 셈이다.

그렇다면 이란은 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세이에드 압바스 아락치 이란 외교부 차관과 최종건 한국 외교부 차관

첫번째, 공개 자료가 말하고 있는 것들이다. 하티브자데 대변인은 2일 발표를 통해 이란 정부가 이번 결정을 내린 이유에 대해 “한국 정부의 요청과 이란 사법부의 규정에 의거해” 해양 오염을 일으킨 “선원들이 인도적 차원에서 이란을 떠날 수 있게 허용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락치 차관이 최 차관에게 한국이 보관 중인 이란 자산 70억 달러(악 7조6000억원)의 동결을 “풀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양쪽은 이 금융자산을 풀 수 있는 유용한 메커니즘에 대해서 논의했다. 한국 쪽 역시 이 동결자금을 가능한 한 빨리 풀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임을 말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외교부도 보도자료를 통해 “최 차관은 이란 동결자금과 관련해 우리 정부가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속도감 있게 추진해 나가면서, 미국 측과 협의가 필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대미 협의를 투명하게 진행해 나갈 것을 이란 측에 설명했다”고 밝혔다. 두 나라의 자료를 모아 보면, 이란이 동결 자금 문제와 관련한 ‘완전한 해법’을 얻지 못한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전통적 우호국인 한국과 관계를 고려해 선원 석방이라는 선제적 조처를 내렸음을 알 수 있다. 사건 발생 이후 외교부가 보여온 신속한 대응이 차갑게 얼어붙었던 이란 쪽의 마음을 녹이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다.

억류 중인 한국 선박 선원들의 석방 사실을 알리는 사이드 하티브자데 이란 외교부 대변인. 총 억류 인원 20명 중 한국 국적은 5명이고, 나머지는 미얀마, 베트남, 인도네시아 국적이다. 선장의 억류는 계속된다. 이란 외교부 누리집 갈무리

두 번째는 공개 자료가 말하지 않는 것들이다.

이란의 한국 선박 억류 사건이 전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 모은 것은 ‘미묘한 타이밍’ 때문이었다. 이란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헌신짝처럼 내다 버린 ‘이란 핵협정’ 복귀를 공언해 온 조 바이든 신임 대통령의 취임을 코앞에 둔 시점에 이번 사건을 일으켰다. 나포가 이뤄지기 전날인 3일은 미국이 드론 공격을 통해 ‘이란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을 암살한 지 1주년 되는 날이었고, 나포 당일인 4일엔 이란이 이란 핵협정의 제약을 깨고 농축도(무기용 고농축 우라늄의 농축도는 90% 이상) 20%의 우라늄 생산을 재개했다. 향후 미국과의 관계 설정에서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등 이란 내 강경파들이 힘을 받는 모습이었다. 한국 선박 나포 역시 이 혁명수비대에 의해 이뤄졌다.

하지만, 이후 이란은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국과 주변국을 상대로 추가적 도발을 보이기보다 이란 핵협정을 되살리려는 현실적인 모습을 보이는 중이다. 이와 관련해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은 1일(현지시각) 미국 과 인터뷰에서 이란은 미국과 관계를 재설정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미국이 서둘러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자 트럼프 행정부의 이란 핵협정 파기를 비판해 온 유럽연합은 2일 자신들이 미국과 이란이 핵협정에 복귀하는 것을 조정할 수 있다며 적극 중재에 나서는 중이다. ‘바이든 행정부와 어떤 관계를 설정할 것이냐’란 외교 노선을 둘러싼 이란 내부의 치열한 논쟁 끝에 일단 ‘온건파’들이 승리를 거둔 모습이다. 그러나 자리프 장관이 “미국에 시간이 많지 않다”고 밝혔듯, 미국이 서둘러 호응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이란 역시 강경 자세로 돌아설 수 있다.

이런 국제 정세의 숨가쁜 흐름을 지켜본다면, 이번 선원 석방도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라는 큰 맥락에서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 ‘온건파’로 분류할 수 있는 이란 외교부는 억류 직후부터 이번 억류는 동결자금과는 관계없는 ‘해양 오염과 관련된 기술적 견해’라는 방침을 줄곧 유지해왔다. 이란 외교부가 이런 공식 방침을 고수해줬기 때문에 조기 석방이 이뤄질 수 있었다. 결국, 핵협정 복귀라는 합리적 대외 정책을 선택한 이란의 전략적 선택과 사건 이후 한국 정부가 보여온 노력이 맞물려 선원 석방이란 큰 외교 성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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