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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82년생 김지영' 보고 울었다더니..그들은 왜 성범죄에 빠졌나

백수진 기자 입력 2021. 02. 06. 03:10 수정 2021. 02. 07.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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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심리학자가 본 남성 페미들의 두 얼굴
/일러스트=유현호

“‘82년생 김지영' 책을 읽고 눈물을 흘렸고 절망감이 들었다.” “여성다움이 원순다움이다. 여성 중심, 노동 중심 세상을 만들겠다.”(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최근 확산하는 미투 운동은 남성 중심적 성차별 문화를 극복하는 과정이다. 미투 운동을 통해 인권 실현이라는 마지막 과제에 동참해 달라.”(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회의 성적 권력 구성은 압도적으로 여성에게 불리하게 조성돼 있다.”(김종철 전 정의당 대표)

성 평등과 여성 인권에 목소리를 높였던 진보 진영이 또다시 성 비위 사건에 휘말렸다. 지난달 25일 정의당은 김종철 대표가 같은 당 소속 장혜영 의원을 성추행한 사실이 드러나 직위 해제했다고 밝혔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오거돈 전 부산시장 등 더불어민주당 정치인에 이어 정의당까지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게 됐다. 피해자인 장혜영 의원은 입장문을 내며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남성들조차 왜 번번이 눈앞의 여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에 이토록 처참히 실패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남성 페미니스트’를 선언했던 진보 정치인들조차 눈앞의 여성을 존중하는 데는 처참히 실패했다. 이들의 페미니즘은 권력을 위한 포장이었을까, 아니면 권력을 쥐고 변질한 것일까.

안희정 전 충남지사. /조선일보DB

◇권력 쥐며 공감능력 상실

심리학자들은 이들이 권력에 심취해 자기 행동이 범죄라는 인식조차 못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권력형 범죄는, 본인 행동에 대한 경계심이 해이해지기 때문에, 저지를 당시에는 불법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권력이 갖는 독특한 메커니즘이 있어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도덕적 잣대를 갖고 자기 관리를 해야 하는데,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권한이 커지면서 자기비판 의식은 흐려지기 쉽죠.”

실제로 권력을 쥐면 억제 능력과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조지선 연세대 객원교수(심리학)는 “권력의 큰 부작용 중 하나가 공감 능력 상실”이라면서 “권력자가 되면 공감의 기초가 되는 거울 뉴런의 활성도가 떨어진다는 실험 결과도 있다”고 했다. “어떻게 저렇게 똑똑하고 목표 의식이 명료한 야망가들이 저런 짓을 할까 싶잖아요. 오랫동안 제왕적 위치에 있다 보면 부하 직원이 어디가 아픈지, 힘든 일이 있는지 공감하는 능력이나 자신을 점검하는 억제 능력이 저하되는 경향이 있죠.”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지난해 6월 구속영장이 기각된 뒤 부산 동래경찰서 유치장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권력형 성범죄 유형은 나르시시즘에 빠져 죄책감을 느끼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30대 직장인 김유진(가명)씨는 회식 자리에서 궁금하지도 않은 50대 부장의 연애사를 들어야 했다. 부장은 “결혼하기 전 여자를 40명 만나봤다”며 거들먹거리더니 이내 부하 여직원들의 외모를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기 시작했다. 김씨는 “너는 30대치고는 예쁘다”는 부장 말을 듣고 분노가 치밀었지만, 겉으론 티를 내지 못했다. 그는 “‘부장님은 50대치고도 못생겼다. 거울 좀 보시라'고 받아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고 했다. 김씨는 몇 달 뒤 조용히 다른 회사로 이직했다.

범죄학자인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자기만의 왕국을 만들고, 상사와 부하 관계를 왕과 신하 관계로 여기는 교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길 가다 만난 남자가 시답잖은 소릴 하면 바로 경찰에 신고하거나 욕을 할 텐데 상사한텐 그럴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 부하가 친절하게 대하면 상사는 ‘내가 이성으로 느껴지는구나’ 하는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는 식이죠.” 그는 “혹여 그런 착각이 들 땐 ‘내가 성추행범으로 가는 직전 단계에 있구나!’ 하고 느끼도록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권력이 생기는 과정에서 보상 심리도 작동한다”면서 “‘이렇게 노력하며 살아온 내 인생에 성추행이 뭐 그렇게 큰일이야' 하며 느슨해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자아도취가 심해지면 자신을 향한 잣대와 타인을 향한 잣대가 달라져 버려요. 내가 이렇게 특별하고 대단한 사람이니 내가 하는 행동도 범죄가 아니라고 합리화하는 거죠.”

세계 여성의 날을 앞두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시청 브리핑룸에서 여성 안전 대책 기자설명회를 하고 있다. /뉴스1

◇머리로만 남녀 평등

페미니스트를 자처한 남성 정치인의 민낯이 드러나자,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박완서 작가의 소설집 ‘아주 오래된 농담’(2000) 속 한 대목을 공유했다. “우리 동료 교사가 한 소린데 페미니스트인 척하는 남자를 젤루 조심해야 된대. 위선자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족속이래나 봐.” 소설 속에서 아내를 위하는 척하지만, 밖에선 바람을 피우고 있던 남편은 아내의 이 말을 듣고 속으로 뜨끔하다. 남성 페미니스트 정치인의 성 비위 사건이 잇따르자 “작가가 20년 후를 내다봤다”며 화제가 됐다.

범죄학자인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이들의 두 얼굴을 “성 인지 감수성이 내재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의식적으로는 남녀평등을 주장하면서 권력을 쥐고 그 자리까지 올라갔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선 무의식이 드러난 것이죠. 성 인지 감수성이 완전히 내재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호의를 베푼다’고 여겼을 수 있죠.”

오윤성 교수는 “이들은 어떤 언행을 해야 자신한테 도움이 될지 일반인보다 훨씬 더 정확히 안다”면서 “권력을 얻기 위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포장은 잘하는데 진정성은 결여돼 있는 것”이라고 했다. “사실 남녀 구분이 없어요. 일부 여성도 자신들이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면서 박 시장 사건에선 ‘피해 호소인’이라는 말을 쓰잖아요. 페미니즘을 이용해 권력에 다가섰지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본질적 문제는 외면하는 거죠.”

◇'미투' 유독 진보에서만?

박원순·오거돈 전 시장의 성추행 사건으로 치르는 보궐선거를 앞두고 야권에선 “인권을 부르짖던 진보의 위선과 민낯이 드러났다”고 공세를 퍼붓고 있다. 심리학자들은 “진보 진영이 성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은 통계적·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일축했다. 다만 “그런 주장이 나올 정도로 연달아 대형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과거 성적 일탈을 용인했던 운동권 문화의 영향인지 의심은 해볼 수 있다”(오윤성 교수)고 했다.

문화 평론가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여성을 대상화하는 남성 중심주의 문화나, 성적 일탈로 남성성을 과시하려는 문화가 뿌리 깊다”면서도 “다만 진보주의자들이 사회 해방과 성 해방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성범죄에 대해 관대했다고 본다”고 했다. “‘나와 관계를 해야 개방된 여자'라는 식으로, 성적 해방을 마치 기득권이나 관습에 대한 저항처럼 여기는 거죠. 받아주지 않으면 고리타분한 여성으로 취급하고요. 반면 보수는 어쨌든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고, 성적 문제는 감추려 하는 성향이 있다 보니 남성 우월적 태도가 나타나는 양상이 달라졌다고 봅니다.”

2019년, 수행비서 성폭행 혐의로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징역 3년 6개월이 확정되자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기뻐하고 있다. /고운호 기자

◇과잉 의전 만연한 조직 문화 바꿔야

안희정 전 지사는 재임 기간에 성 인지 감수성 교육, 인권 교육 사업에 앞장섰다. 박원순 전 시장은 서울 동작구의 성 평등 도서관 ‘여기’ 설립을 주도했고, 자기가 보유했던 성 평등 운동 사료까지 기증했다. 이는 고위 공직자의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이 단순한 예방 교육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임을 보여준다. 조지선 교수는 “일시적 교육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나도 권력을 쥐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스스로 돌아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했다.

과잉 의전과 성차별적 업무 지시가 만연한 조직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한국여성의전화와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서울시 시장실과 비서실이 “일상적 성차별로, 성희롱 및 성추행 등 성폭력이 발생하기 쉬운 업무 환경”이었다고 짚었다. 피해자 측은 “심기 보좌, 혹은 ‘기쁨조’와 같은 역할을 사전에 요청”받았고, 속옷 심부름을 하거나 침대에서 시장을 깨우는 등 성차별적 업무를 강요받았다고 폭로했다. 이수정 교수는 “겉으로는 원대한 가치를 지향하지만 습벽은 따라가지 못하면서 괴리가 발생한 것”이라면서 “밖에서는 양성평등을 강조해놓고 속옷 심부름은 여성 비서한테 시키는 것이 어떻게 양성평등이겠느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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