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마 폭행' 3년.. 40대 가장이 삶을 버렸다

조철오 기자 2021. 2. 11.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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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블랙박스]피해자는 방광 파열로 평생 기저귀 생활
재기 위해 구직 나섰지만 업주들 "치료 받아라" 거절

영하 10도 한파가 몰아친 지난달 10일 오전 7시, 경기도 용인시 한 공원에서 조모(42)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조씨 휴대전화에는 ‘미안해. 내가 너무 지쳐서...’라는 카카오톡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하루 전 아내(43)에게 보낸 마지막 메시지였다.

장례를 마친 아내는 남편 뼛가루를 부산의 한 납골묘에 안치한 뒤 통곡했다. 1997년 소개팅으로 처음 남편을 만나 아들, 딸 남매를 낳고 살아온 24년. 황망한 이별 앞에 아내는 오열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조씨는 졸업 후 방송사에 취직해 삽화와 그래픽 작업을 담당했다. 2009년부터는 작은 광고 대행사를 운영하며 꿈을 키웠다. 평범한 가장의 삶은 3년 전 ‘묻지마 폭행’ 사건으로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무자비한 묻지마 폭행...방광 찢어지는 전치 12주 중상

2018년 1월 16일 밤, 집 근처 상가 건물 술집에서 친구들과 한잔하던 조씨는 화장실로 향하다 좁은 통로에서 김모(39)씨와 어깨를 부딪쳤다. 일면식도 없었던 김씨는 다짜고짜 조씨를 폭행했다. 쓰러져 저항조차 못하는 조씨의 머리와 몸통을 마구 짓밟았다. 김씨는 “살려달라”며 인근 가게로 피신한 조씨를 뒤쫓아가 길거리로 끌어낸 뒤 무자비한 폭행을 계속했다.

조씨는 방광이 찢어지는 중상을 입었다. 앞니 3개가 부서졌고, 이뿌리가 뽑히기도 했다. 전치 12주 진단이 나왔다. 사건 5개월 뒤 열린 재판에서 수원지법은 “피고인은 피해자에게 진정으로 사과하지 않았고, 피해를 회복하려는 충분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며 김씨에게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중고차 매매 관련 일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김씨는 2015년에도 술 취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때려 기소유예 판결을 받은 전력(前歷)이 있었다. 재판부는 가해자 김씨가 폭력적 성향이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자존감이 크게 상실돼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게 됐다”며 “피해자와 가족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상당하다”고 판시했다.

지난달 10일 경기도 용인시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40대 가장 조모씨의 장례식 사진. 조씨는 2018년 1월 묻지마 폭행 후 방광파열이란 영구 장애를 갖게 됐다. 이후 삶을 비관하다 결국 극단적 선택을 했다. /유가족 제공

◇하루 30여번 기저귀 갈아 차야...”사람 만나는 게 두렵다”

조씨는 심각한 폭행 후유증에 시달렸다. 소변 조절 능력을 잃어, 성인용 기저귀를 하루에 30번 이상 갈아 차야 했다. 자고 일어나면 침대 매트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수치심을 견디다 못해 찾은 정신과 병원에선 공황 장애, 분노 조절 장애 진단을 내렸다. 신경 조절기를 착용한 뒤 상태가 조금 나아졌지만, 기저귀를 차고 사는 삶은 변하지 않았다.

조씨는 집 밖 출입을 끊었다. “사람 만나는 게 두렵다”고 했다. 조용하고 내성적이던 성격이 폭력적 성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가정 경제도 휘청거렸다. 중상해 구조금과 장해 구조금 등 1억212만원을 지원받았지만, 병원비와 사업체 정리에 쓰고 나니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 이들 구조금은 법무부가 범죄 피해자로 인정한 경우 지급한다. 특히 중상해·장해 구조금은 피해 정도가 일반 피해자보다 심각하고 앞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단할 때 나온다.

조씨는 운영하던 광고대행사 계약이 줄줄이 깨지면서 위약금을 물어야 했다. 가정주부였던 아내는 병원 야간 간호사 일자리를 구했다. 주말에는 택배 아르바이트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잠잘 시간을 쪼개야 했다.

◇가해자에 손해배상 냈지만 한 푼도 못 받아

조씨와 가족들은 김씨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지난해 7월 “김씨가 조씨에게 2억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나왔고, 10월에는 “김씨가 조씨 아내와 자녀에게 2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도 나왔다. 하지만 조씨와 가족은 아직 김씨에게서 한 푼도 받지 못했다. 현재 강제 집행 절차를 진행하고 있지만, 배상금을 받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조씨 측 변호인은 “가해자는 가진 재산이 ‘0’에 가까울 정도로 한 푼도 없는 상태”라고 했다.

경제적으로 몰린 조씨는 구직 활동에 도전했다. 편의점 등에서 여러 차례 면접을 봤다. 그때마다 업주들은 “함께 일하기 어려울 것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사고 후유증으로 말투가 어눌해졌고, 몸을 움직이는 동작도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와 지자체 취업 지원 상담을 받았지만, “치료부터 받는 것이 좋겠다”는 말이 되돌아왔다. 조씨는 “가장 노릇을 할 수 없게 됐다” “죽고 싶다” 같은 비관적인 말을 입에 달고 살기 시작했다.

지난달 극단적 선택을 한 묻지마 폭행 피해자 조모씨의 휴대전화 메세지 일부. 조씨는 극단적 선택 직전 유서 형식의 글을 작성했다. 가해자에 대한 원망, 남겨질 가족들에 대한 걱정 등이 고스란히 적혀져 있다. /유가족 제공

◇분노는 체념으로...”아빠가 미안해” 극단적 선택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던 조씨는 휴대전화에 자신의 심경을 기록했다. 분노가 가득했던 글은 한탄과 체념으로 변해갔다. ‘가해자는 편안한 삶을 살고, 피해자는 평생 고통 속에 살아야 하는지’(2020년 12월 23일) ‘노력해도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 ‘평생 이런 모습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다’ ‘얘들아, 아빠가 미안해. 지켜주지 못해서...’(1월 8일).

조씨처럼 갑작스럽게 형사 사건에 휘말려 영구 장애로 고통을 겪는 피해자는 적지 않다. 2019년 국내 형사 사건 피해자 31만4389명 중 살인이나 강간 같은 강력 범죄 피해자 비율이 8.4%(2만6476명)에 달한다.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조씨 같은 상황에 처한다.

전국범죄피해자지원연합회 관계자는 “국민 누구나 잠재적 피해자가 될 수 있다”며 “형사 사건 피해자가 정상 생활을 회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범죄 피해자에 대한 정부나 지자체의 체계적인 사후 관리가 절실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오경식 전 한국피해자학회 회장은 “경제적 지원만큼 중요한 것이 범죄 피해자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며 “지속적 돌봄이 가능하도록 사회 안전망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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