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있어도 월셋집을 못 구한다", 미국에서 진짜 있는 일

김태용 2021. 2. 1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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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자동차 보험, 전기·전화·가스 요금까지 영향 끼치는 '신용점수'

2018년 7월부터 2020년 8월까지 2년이라는 짧은 시간, 미국 애리조나라는 제한된 지역에서 경험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기자말>

[김태용 기자]

"당신은 돈이 있어도 월셋집을 구하지 못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다. 그러나 미국에선 맞는 말이다. 미국에 도착하고 우리 가족이 살 집을 찾았다. 인터넷에서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했다. 곧장 집주인에게 계약하자고 요청했다. 월세를 꼬박꼬박 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집주인은 우리에게 집을 주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는 신용점수(Credit Bureau Score·신용정보점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떤 말을 해도 집주인은 우리와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는 임대보증금을 높여주고, 월세를 1년 선납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제야 집주인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외 예금계좌 잔액 증명서, 미국 지인의 보증서를 제출하고 우리가 마음에 드는 집을 계약할 수 있었다. 힘겹게 월세 계약서에 서명하니 개그콘서트의 옛날 유행어가 생각났다. 높은 신용점수만 대우하는 '더러운 세상!'
 
▲ 애리조나 집 신용점수가 없어 집을 못 구할 뻔 했다.
ⓒ 김태용
 
2년이 지나, 월세 계약이 종료될 즈음이었다. '신용점수'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집주인은 다음 세입자를 찾기 시작했다. 다음 세입자가 될 사람에게 집을 보여 줬다. 하루에 3, 4가족이 집을 찾아왔다.

집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다음 세입자가 빨리 구해질 것으로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집주인이 원하는 수준의 신용점수를 가진 사람이 없었다. 그때 알았다. 겉모습은 멀쩡한데, 재정 상태가 나쁜 미국인들이 제법 많다는 사실을 말이다.

2주 동안 30여 가족이 집을 본 후, 한 가족이 집주인에게 겨우 간택되었다. 그간 우리는 예비 세입자들에게 집을 보여주느라 고생이 많았다. 또 그 말이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높은 신용점수만 대우하는 '더러운 세상!'

신용사회의 신분 계급

미국에서 신용점수는 개인의 신용도를 보여준다. 간단히 말하면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해준다. 성실하게 대출금 또는 할부금을 갚은 사람은 신용점수가 높다. 낮은 신용점수는 그 반대를 뜻한다. 돈 떼일 확률이 높다는 것을 뜻한다.

높은 신용점수를 가진 세입자를 구하면, 매달 꼬박꼬박 월세를 받을 확률이 높다. 신용점수가 높은 사람은 어디서든 환영받는다. 할부로 자동차를 쉽게 구입하고, 신용카드 한도가 높아지고, 대출이율도 낮아진다. 미국에는 이런 말이 있다.

"불법체류보다 신용불량이 더 무섭다."

신용점수가 낮거나 없다면 삶은 그야말로 고달프다. 우리가 월세를 구할 때처럼 말이다. 이처럼 미국인들에게는 신용점수가 생명같이 소중하다.

미국에는 크게 3개의 신용평가기관이 있다. ▲트랜스 유니언(Trans Union) ▲에퀴팩스(Equifax) ▲엑스페리언(Experian)이다. 기관마다 고유한 시스템을 활용해 채무자의 신용정보를 수집한다. 이들 기관에서는 여러 개 신용점수 산정모델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선 페어아이삭앤컴퍼니(Fair, Isaac and Company)에서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통해 산정된 피스코스코어(FISCO Score) 신용점수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신용평가 기관마다 저마다 다른 산정방식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 ▲연체 이력의 유무 ▲부채의 크기 ▲대출 사용 기간 등의 요소를 반영해 점수를 산출한다.

신용점수의 범위는 보통 300점에서 850점까지다. 높은 점수가 양호한 신용도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700점 이상이면 신용이 양호하다고 평가된다. 통상적으로는 650점 밑으로 떨어지면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긴다. 대출이자가 높아지고, 채무를 갚으라는 독촉 전화가 올 수 있다.

인적 자원관리협회(Society for Human Resources Management)에 따르면, 고용주의 절반 이상이 채용 과정에서 구직자의 신용점수를 조사한다고 한다. 신용점수가 채용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 밖에, 자동차 보험, 전기·전화·가스 요금까지 신용점수의 영향을 받는다. 점수가 낮으면 가격과 조건이 불리해진다. 신용점수가 낮은 것도 서러운데, 같은 서비스를 누리면서 돈을 더 내야 하는 것이다.

해마다 오르는 신용점수

미국은 '이민 국가'다. 전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로 형성된 다민족 국가다. 인종, 언어, 이념부터 종교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이러한 구성원들의 갈등을 없애고 화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법과 원칙'이 중요하다.

미국에 살면, 아주 사소한 문제도 법정으로 가는 경우가 꽤 있다. 미국을 '소송 천국'으로 부르는 이유다. 소송은 사건이 일어난 후의 처리 방법이다. 긴 시간이 소요되고 큰 비용이 발생한다. 따라서 상호 간 계약 또는 거래가 이루어지기 전에 이것저것 따져보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상대방을 평가해야 할까? 이 질문이 신용점수를 탄생하게 했다. 사회에서 인정하는 점수 제도를 만들 상대방의 신용을 손쉽게 파악한다는 것이다.

미국인의 신용점수는 해마다 상승하고 있다. 신용평가기관 엑스페리언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미국인의 평균 신용점수는 703점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절정에 달했던 2020년 4월에는 708점이었다. 이는 사상 최고치다.

2010년부터 코로나19 직전까지 미국은 경제확장과 낮은 실업률을 경험했다. 사람들은 많은 돈을 빌렸고, 그 빚을 제때 갚았다. 코로나19 이후 각종 대출 등이 상환 유예되었다. 최근 바이든 행정부는 행정조치로 학자금 대출 채무를 탕감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미국인들의 신용점수를 상승시키는 요인이다.

다만, 신용점수의 상승은 양호한 재정 상황을 뜻하지 않는다. 금융정보 및 분석회사 S&P 글로벌(S&P Global)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미국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곳은 워싱턴 D.C.(Washington, D.C.)다. 연간 중위소득이 9만695달러다. 이 지역 주민의 평균 신용점수는 703점으로 그리 높지 않다.

미국에서 평균 신용점수가 높은 지역은 미네소타(Minnesota)로 733점이다. 이 지역 중위소득은 연 7만4000달러다. 앞서 언급한 사례만 봐도 신용점수와 소득은 큰 상관관계가 없다.

신용점수는 애초부터 채무자를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다. 대부기관 등 채권자가 대출의 위험성을 판단하기 위해 만든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 말 그대로 신용점수는 대출과 할부금을 제때 갚을 수 있는 능력의 정도를 보여준다.

드라마가 아닌 현실
 
 넷플릭스 인기 SF 드라마 <블랙 미러>(BLACK MIRROR) 시즌 3의 '추락(Nosedive)'의 한 장면.
ⓒ 넷플릭스
 
혹시 넷플릭스 인기 SF 드라마 <블랙 미러>(BLACK MIRROR)를 본 적 있는가? 옴니버스 형식의 영국 드라마인데, 매우 강한 흡입력을 자랑한다. 나에게 가장 인상 깊은 에피소드는 바로 시즌 3의 '추락(Nosedive)'이다.

드라마 주인공이 사는 세계에서는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 평점이 경제력이다. 그 평점이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 자신이 원하는 집으로 이사 갈 수 있다. 소셜미디어 평점이 높아야 좋은 자동차도 탈 수 있다. 주인공은 소셜미디어 평점에 집착한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소셜미디어 평점을 높이는 데 혈안되어 있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신용점수'가 떠올랐다. 현실에서도 낮은 신용점수를 가진 자는 원하는 집에 세 들어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 은행에서는 높은 이율로 대출을 받아야 한다.

반면 신용점수가 높다면 선택의 폭은 넓어진다. 삶은 윤택해진다. 이것은 드라마가 아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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