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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하나가 불상, 모든 것을 압도하는 아우라

김대오 입력 2021. 02. 13.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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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촨여행 ④] 71미터 세계 최대 석각, 러산대불

이 글은 지난 2020년 1월 5일~10일(5박 6일) 중국 쓰촨 여행을 다녀온 기록입니다. <기자말>

[김대오 기자]

주자이거우(九寨沟)에서 러산(樂山)대불까지는 637km. 쓰촨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남하가 시작되었다. 길에 말, 소, 야크가 차례로 등장한다. 차가 다니는 큰 도로를 중국어로 '마로(馬路)'라고 하는데, 정말 도로에 차와 말이 함께 다닌다. 험준한 산세에 기댄 인가는 황량한 자연에 살림살이가 힘겨워 보인다.
 
▲ 도로를 건너는 말떼 차가 다니는 큰 도로를 중국어로 ‘마로(馬路)’라고 하는데, 정말 도로에 차와 말이 함께 다닌다.
ⓒ 김대오
 
강족(羌族)자치구 민속촌 근처에서 1박을 하고 아침 일찍 서둘러 다시 러산으로 향한다. 강족은 원래 칭하이(靑海)성에 거주하는데 현재 쓰촨 북부에 2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강족이 지은 집은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아 최근 강족의 노하우를 활용한 건축 인테리어가 매우 유행한다고 한다. 남도 민요 '강강수월래(强羌水越來)'를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는 의미로도 풀이하는데, 강족은 매우 강한 오랑캐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던 모양이다. 강족 민속촌의 아침이 버스 창 너머로 스친다.

"길은 내가 직접 걸어야 길이 된다"는 말이 있지만, 먼 타국의 버스 창가 풍경은 예사롭지 않은 각별함으로 다가온다. 버스가 원촨(文汌)에 들어섰는지 끊어진 도로, 기울어진 건물들이 아직 복구되지 않은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2008년 5월 12일, 베이징올림픽을 앞둔 중국인들을 충격에 빠뜨렸던 원촨대지진의 흔적이다.
 
▲ 원촨대지진의 흔적 원촨(文?)에 들어섰는지 끊어진 도로, 기울어진 건물들이 아직 복구되지 않은 모습을 드러낸다.
ⓒ 김대오
 
가이드가 당시의 기막힌 사연들을 들려준다. 지진이 점심시간에 일어났는데 중학교의 한 교사가 점심을 먹고 깜빡 잠이 드는 바람에 종을 치지 않아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은 다행히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10년이 지났지만 상처는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

버스는 춘추전국시대인 기원전 256년에 만들어진 고대 수리 관개 건축물 두장옌(都江堰) 곁을 지난다. 이빙(李冰)과 이랑(李郞) 부자는 화약도 없던 시절에 물길을 가르고 제방을 쌓아 자주 범람하던 민강(岷江)의 홍수를 효과적으로 막는, 고대의 놀라운 치수 능력을 선보였다.

중국 학자 위치우위(余秋雨)는 중국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건축물은 만리장성이 아니라 두장옌이라고 했을 정도로 쓰촨을 풍요롭게 하는데 기여한 건축물이다. 근처의 도교 성지 칭성산(靑城山)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 러산 시내의 모습 울창하게 우거진 아열대 나무들과 도로변의 꽃들이 오랜 시간 남하했음을 일깨운다.
ⓒ 김대오
점심때가 되어서야 버스는 메이산(眉山)을 거쳐 러산에 도착했다. 울창하게 우거진 아열대 나무들과 도로변의 꽃들이 오랜 시간 남하했음을 일깨운다. 러산대불 맞은편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드디어 배를 타고 세계 최대 석각대불인 러산대불을 향한다.
러산대불은 민강, 청의강(靑衣江), 대도하(大渡河) 3개의 강과 어메이산(峨眉山), 링윈산(凌雲山), 우롱산(烏龍山) 3개의 산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교통의 요충지지만 홍수로 강물이 불어나면 해상사고가 끊이지 않던 곳이기도 하다.
 
▲ 부처가 누워 있는 형상 대불이 조성된 산을 멀리서 보면 와불의 형상을 볼 수 있다.
ⓒ 김대오
   
▲ 애묘와 대불사 벼랑을 파고 조성된 무덤인 애묘(崖墓)와 그 위로 해통(海通)스님의 석존이 모셔진 대불사(大佛寺)가 있다.
ⓒ 김대오
 
붉은 사암으로 뒤덮인 암석산이 눈앞에 펼쳐진다. 관광객이 주는 먹이에 길들여진 갈매기가 길을 안내하듯 유람선을 호위한다. 붉은 바위에 작은 구멍들이 보이는데 바로 애묘(崖墓), 벼랑을 파고 조성된 무덤들이다. 그 위로 사찰 건물이 보이는데 러산대불 조성을 시작한 해통(海通)스님의 석존이 모셔진 대불사(大佛寺)다. 해통은 자신이 만들 대불을 산정에서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다.
유람선이 점점 러산대불에 다가가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높이 71m, 폭 28m의 거대한 미륵불은 그 앞에 서는 모든 사람을 개미처럼 작고 미약한 존재로 만든다. 7m의 귀로, 5m의 눈으로 지긋이 저마다가 지닌 소원을 헤아리며 내려다보는 것만 같다. 대불을 수호하는 양 옆의 금강역사의 크기도 상당하지만, 워낙 큰 대불 앞이라 상대적으로 너무 작아 보인다.
 
▲ 대불을 수호하는 금강역사 대불을 수호하는 옆의 금강역사의 크기도 상당하지만, 워낙 큰 대불 앞이라 상대적으로 너무 작아 보인다.
ⓒ 김대오
 
왜 이렇게 큰 불상을 서역에서 중국 본토로 들어서는 길목에 세워 놓은 것일까? 표면적인 이유는 불법(佛法)을 선양하고, 그 앞 거센 물줄기 만나는 지점에서 일어나는 해상사고를 불법으로 막겠다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것만 같다.

최초 창건자 해통은 현장법사를 통해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바미안 석불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고, 713년 그보다 20m가 더 큰 거대 석불 공사를 시작해 10년 동안 대불의 머리와 가슴 부분을 완성한다. 이후 이곳 관리였던 장구겸경(章仇兼琼)이 소금세를 건설 자금으로 유용해도 좋다는 당 현종의 비준을 받아 7년간 가슴과 무릎을 완성한다.

이후 안사의 난 등으로 지지부진하던 대불 공사는 위고(韋皐)라는 열정적인 불교신도 관리에 의해 완공된다. 위고는 15년 동안 대불의 연화좌, 무릎 부분을 완성하고, 단청, 도금 작업에 이어 13층에 이르는 대상각(大像閣)까지 건설했다고 한다.

대불을 둘러싼 누각은 송원(宋元) 20년 전쟁 시기에 불타 훼손되었고, 또 민국 초기의 군벌 혼전 시기에 대포를 맞는 등 심각한 손상으로 세부적인 예술 양식과 조각, 채색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여전히 수천 년의 풍화와 침식을 견디고 선 대불은 위풍당당하고 그 앞의 모든 것을 압도하는 아우라를 지녔다.
 
▲ 러산대불 수천 년의 풍화와 침식을 견디고 선 대불은 위풍당당하고 그 앞의 모든 것을 압도하는 아우라를 지녔다.
ⓒ 김대오
   
▲ 산이 하나의 불상이고, 불상이 하나의 산 산이 하나의 불상이고, 불상이 하나의 산(山是一尊佛, 佛是一座山).
ⓒ 김대오
 
당 현종은 715년 미륵사상을 금지하는 율령을 반포하지만, 러산대불에 대해서만큼은 정부의 세수를 지원하며 조성을 도왔다. 그 진짜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고인돌의 기능이 장례 자체보다 집단의 결속을 다지고, 그 세력을 과시함으로써 다른 세력이 함부로 자신들을 넘보지 못하게 한 것처럼 거대한 러산대불은 토번, 티베트 등의 이민족과 한족 농경문화의 경계에 서서 거대한 세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이민족들의 동진을 막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싸워야할 상대가 저렇게 거대한 불상을 조성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지녔다고 생각하면 누구도 쉽게 이곳을 넘진 못했을 것이다.

유람선이 멀어지자 대불도 조금씩 작아진다. 피안의 언덕에 우뚝 선 대불은 그렇게 멀리서 달려온 관광객들을 차안의 현실로 돌려보낸다. 56억 7천만년 후에 나타나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는 과연 저 러산대불의 형상을 하고 있을까? 산이 하나의 불상이고, 불상이 하나의 산(山是一尊佛, 佛是一座山)인 이 거대한 상상력의 세계가 고단한 차안을 견딜 작은 힘이 되길 기원할 즈음 유람선은 선착장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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