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세 김형석의 자녀교육법 "아이에겐 딱 이것만 주면 된다"

백성호 2021. 2. 17.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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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다들 고민입니다.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하나.” “어떤 식으로 교육을 해야 하나.”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살아온 삶을 기준선 삼습니다. 거기에 맞추라고 자식에게 요구합니다. 왜냐고요? 나한테는 그게 ‘정답’으로 보이니까요. 그게 ‘전부’로 보이니까요. 그런데 그게 정말 정답일까요?

기성 세대는 주입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암기식 교육을 받으며 컸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정답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젊은 세대, 혹은 어린 세대는 다릅니다. 그들은 자신의 답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세대입니다.

여기서 간격이 생기더군요. 부모가 받았던 교육 방식과 자식이 받아야 할 교육 방식. 둘이 너무 다르니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은 최재천 교수에 이어 두 번째 편입니다. ‘100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에게 자녀 교육법을 물었습니다. 크게 보면 두 가지 물음입니다. “자식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걸 어떤 식으로 실생활에 적용하면 됩니까?”

#풍경1


김형석(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올해 102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인터뷰에서 상당히 공격적인 질문을 던져도 그는 좌고우면하지 않더군요.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담담하게 풀어갈 따름이었습니다. ‘100세가 넘으셨으니, 모든 사람이 모두 후배가 돼버려서 그런가. 눈치 볼 필요가 없어져서 그런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목이 마가복음, 누가복음, 마태복음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4복음서 중에 가장 후대에 기록됐다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돼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물음표가 생깁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대목은 제자들이 잊으려야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마가ㆍ누가ㆍ마태복음에는 쏙 빠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종종 논쟁이 벌어집니다. 한쪽에서는 “성경의 기록은 한 글자도 오류가 없다. 모두가 100% 사실이다.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이 대목은 예수님 사후에 생겨난 이야기다.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만 등장한다”고 반박합니다. 김형석 교수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는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을까요.


김 교수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성경에서 이 대목을 읽으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그게 역사적 사실 여부인가. 예수님이 제자들 발 씻어주는 일이 진짜인가, 아닌가인가. 그에 대해 따지고 싸워서 아는 것인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럼 김 교수가 중시하는 건 대체 뭘까요. “정말 중요한 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그게 핵심이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크게 받아들여라.”

#풍경2

사람들이 작은 일로 논쟁할 때, 그는 ‘큰 일’을 짚었습니다. 그게 왜 가능했을까. 안목 때문입니다. 큰 그림과 핵심을 짚어내는 ‘큰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습니다. 김형석 교수가 보는 ‘자녀 교육법’은 어떤 걸까. 아이들을 가르칠 때 정말 중요한 게 뭘까. 그는 교단에서 한평생 학생들을 가르친 교육자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물음을 던졌습니다.

Q : 많은 부모가 자녀 교육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어떤 게 ‘정답’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녀 교육에도 정말 중요한 핵심이 있나요.

A : “핵심이 있습니다. 그건 부모가 아이의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

Q : 아이의 자유, 그게 왜 소중한가요.

A :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무엇을 사랑하는 겁니까. 그 사람의 돈인가요, 아니면 명예인가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할 때, 무엇을 사랑하는 겁니까. 아이의 성적인가요, 아니면 재능인가요. 여기에 답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걸 생각해 봐야 합니다.”
뜻밖의 되물음이었습니다. 부모는 다들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 물음은 참 낯섭니다. ‘나는 자식을 사랑한다, 그런데 자식의 무엇을 사랑하는 것일까.’ 우리가 거의 던져본 적이 없는 물음입니다. 김 교수는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조건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첫째 조건이 뭘까요. 이 조건을 충족할 때 우리는 비로소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Q : 그 조건이 무엇입니까.

A : “그 사람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겁니다. 상대방의 자유를 사랑하는 겁니다.”

Q : 우리는 자식이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길 바랍니다. 기대가 충족될 때 자식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자식이 잘 자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아이의 자유’를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A : “저는 한국전쟁 발발 전에 공산주의 치하의 평양에서 2년간 살았습니다. 살아보니 공산주의 사회에는 사랑이 없더군요. 왜 그런지 아세요? 거기서는 자유를 구속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자유를 구속하는데, 어떻게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풍경3

대답을 듣다가 저는 ‘첫 단추’가 떠올랐습니다. 세상 모든 일에 첫 단추가 있듯이, 자녀 교육에도 첫 단추가 있구나. 그걸 잘 꿰어야 나머지도 잘 꿰어지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의 자유를 사랑하는 일. 그게 ‘첫 단추’이구나. 그래도 물음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이어갔습니다.

Q : 아이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건 어떤 건가요. 어떡하면 아이의 자유를 소중히 여길 수 있나요.

A : “자유는 곧, 선택입니다. 아이에게 선택할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이걸 해! 저걸 해!’가 아니라 ‘이런 게 있고, 또 저런 게 있어. 너는 어떤 걸 할래?’ 이렇게 선택의 자유를 줘야 합니다.”

Q : 선택의 자유를 주면, 어떻게 됩니까.

A : “아이에게 근육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삶을 헤쳐갈 마음의 근육입니다. 저는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종종 강연을 합니다. 다른 사람의 강연도 듣곤 합니다. 강연자는 통상 말미에 결론을 내립니다. 이건 이런 거고, 저건 저런 거다. 그러니 이걸 해라. 이렇게 결론을 냅니다. 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Q : 그럼 어떻게 합니까.

A : “이건 이렇습니다. 저건 저렇습니다. 나는 이렇습니다. 내 친구는 보니까 저렇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선택은 여러분이 하세요. 이렇게 말합니다.”

Q : 왜 그렇게 말합니까.

A : “청중의 자유를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녀 교육도 똑같습니다. 부모가 왜 아이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는 걸까요.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자유를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Q : 만약 아이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A : “자신의 일을 스스로 선택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의 자아가 없어집니다. 자신의 중심이 사라집니다. 자식이 아주 어릴 때는 보호해줘야 합니다. 조금 더 자라면 유치원에 다닙니다. 그럼 부모와 자식이 손잡고 같이 갑니다. 스승과 제자가 같이 다니듯이 말입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다닐까요? 사춘기까지입니다.”

Q : 사춘기 다음에는 어떡합니까.

A : “아이를 앞세우고 부모가 뒤에 갑니다. 선택은 네가 해라. 자유는 선택의 기회를 갖는 거니까. 엄마 아빠는 너를 사랑하니까. 이러면서 말입니다. 저는 거기에 사랑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풍경4

18세기 프랑스의 정치사상가이자 철학자, 소설가, 교육이론가였던 장 자크 루소. [중앙포토]


교육학의 대가인 장 자크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입니다. 그러니 “아이의 자유를 소중히 여겨라. 아이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라”는 김형석 교수의 메시지는 루소의 철학과도 상통하더군요.

지난 편에서 만난 최재천 교수는 “부모가 느슨한 끈을 잡고서 자녀를 방목하라”고 했습니다. 그걸 ‘아름다운 방목’이라고 불렀습니다. 방목을 하다 보면 아이가 온갖 시행착오를 겪게 됩니다. 그런 시행착오를 몸소 겪는 일이야말로 아이를 성장하게 하는 보석 같은 거름이 아닐까요.


김형석 교수의 ‘자유와 선택’도 그렇습니다. 자기 선택을 통해 아이가 스스로 시행착오를 경험하게 합니다. 거기서 온갖 문제를 직접 체험하게 하는 일입니다. 결국 인생의 문제를 통해 인생의 솔루션(해법)을 찾는 법이니까요. 참 놀랍습니다. “아이의 무엇을 사랑하는가?”를 물어보라는 날 선 질문 말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아이의 자유를 소중히 여겨라” “아이의 자유를 사랑하라”는 그 메아리 말입니다.

글=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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