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바위산 지하에 인류의 미래가 보관돼 있다

강윤주 2021. 2. 18.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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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바위산 지하에 세워진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는 지구상 최대 규모의 농업 생물다양성 컬렉션이다. 저장고 설계부터 운영까지 총괄하고 있는 저자 캐리 파울러는 "이 책은 종자저장고의 관여한 모든이들에게 바치는 러브레터"라고 말했다. 마농지 제공

사람이 사는 곳 중 지구 최북단, 면적의 60%가 빙하인 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 어떤 곡류나 꽃, 나무도 자라지 못하는 황량하고 척박한 땅이지만 그 속엔 인류의 미래를 구원해줄 생명의 씨앗들이 보관돼 있다. 얼어붙은 바위산 한편, 오묘한 자태의 건물 지하 터널에 숨어 있는 비영리 국제 협력시설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얘기다. 2008년 2월 설립된 이후 세계 각국에서 맡긴 종자 샘플만 100만종 이상 5억개에 달한다. 우리나라도 44개 작물, 2만3,185개 토종 종자를 위탁했다. 지구 최대의 씨앗창고를 두고 사람들은 종말에 대비한 현대판 ‘노아의 방주’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곳을 설계하고 운영을 총괄하고 있는 작물 다양성 전문가 캐리 파울러는 종말이 아닌 미래에 방점을 찍는다. “이 곳은 ‘종말의 날’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손에 건설되지 않았어요. 인류와 작물이 다가올 변화에 더 잘 대비할 수 있도록 무엇이라도 해보려는 사람들이 지어 올린 것이죠. 심각하게 풀기 어려운 전 지구적인 문제라도 신뢰와 선의, 협력과 끈기만 있다면 얼마든지 풀어나갈 수 있다는 낙관주의 믿음을 현실로 증언하는 곳입니다.”

에티오피아 고원지대의 콤볼차 근처에서 타이티스 모하메드가 테프 발효 빵 안제라를 만들고 있다. 테프는 아프리카에서 널리 섭취하는 볏과의 곡물로 크기가 아주 작다. 스발바르 종자저장고에는 60가지가 넘는 전통 테프 품종이 보관돼 있다. 마농지 제공

책은 스발바르 국제종자 저장고를 제안하고 만든 파울러의 기록을 100여장의 사진과 함께 소개한다. 스발바르의 눈부신 절경과 함께 일반인들의 입장이 엄격히 제한되는 저장고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니, 그 생소한 광경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책장을 넘길 가치는 충분해 보인다.

인류가 곡물의 종자 저장고를 만들려던 발상은 스발바르가 처음은 아녔다. 그 이전에도 유엔 식량농업기구(FA0) 산하 전 세계에 존재하는 유전자은행이 1,750개에 달했지만, 예산과 인력 부족으로 운영은 엉망이었다. 보호되는 종자만큼 분실되는 종자도 많았다. 하나의 종자 표본이 사라지는 건 고유 품종이 멸종에 이르는 걸 의미하기에 연구자들 사이에선 “보호실이 아닌 영안실”이란 자조가 흘러 나올 정도였다.

전 세계 각국에서 보내진 종자들이 밀봉된 상자에 담겨져 있다. 저장실은 입구에서부터 수평으로 130미터, 수직으로는 산 정상에서 60미터 이상 내려간 지점에 있다. 핵폭발과 소행성 충돌 등에도 끄떡 없도록 설계 됐다. 마농지 제공

연구자들이 인류의 미래를 위해 작물 다양성을 지켜야 한다고 목놓아 외치는 데 그만한 이유가 있다. 20세기 들어 농업의 기업화로 인해 핵심 작물, 단일 품종의 생산만 가속화되면서 이미 세계 작물 품종의 75%가 사라진 상태다. 여기에 기후위기까지 덮치며 식량안보 위협도 커졌다. 앞으로 늘어나는 세계 인구에 대응하기 위해서 현재 식량 생산량의 최소 50%를 증산해야 하는데, 뾰족한 수도 없다. 전문가들은 온난해진 기후 환경과 병충해에 적응하기 위한 새 품종을 만들기 위해선 최대한 많은 작물 다양성을 보전해놔야 한다고 강조한다. 점점 더 불확실해지는 미래를 위해 들어두는 보험인 셈이다.

파울러가 구상한 저장고는 일종의 백업 드라이브 개념이다. 유전자은행에서 소실되는 위험성을 대비해, 고유 품종의 ‘중복 표본’을 위탁 받아 보관하는 식이다. 전 세계 작물 유전자의 다양성을 보전하는 최후의 보루인 만큼, 시설은 완벽해야 했다. 가장 큰 원칙은 안전과 지속성을 위해 인간의 개입과 비용을 최소화 한다는 것. 인간의 손을 많이 탈 수록 사고의 위험성은 커지고, 예산이 많아질수록 돈에 휘둘릴 여지도 크기 때문이다. 저장실은 상주하는 직원을 두지 않고, 최대한 자연 그대로의 장점을 살려 알아서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핵폭발과 소행성 충돌에도 끄떡 없도록 설계됐고, 기계 냉각 시스템이 고장나더라도, 영하의 기온은 유지된다.

세계의 끝, 씨앗 창고·캐리 파울러 글·마리 테프레 사진·허형은 옮김·마농지 발행·176쪽·2만5,000원

스발바르가 더욱 의미 있는 건, 선한 의지의 결실이란 점이다. 처음 스발바르가 만들어질 때,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우생학 음모론에서부터 몬산토(초국적 농업 대기업) 연관설까지. 하지만 노르웨이 정부와 비영리재단이 돈을 대고, 종자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세워지자 전 세계 국가들의 참여가 이어졌다. 지역사회의 자발적 도움도 컸다. 스발바르 주민들은 행여라도 북극곰이 나타나 저장소를 공격하지 않을까 돌아가며 보초를 서기도 한다.

북극의 푸른 빛을 배경으로 서 있는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마농지 제공

저장고의 건물 외관은 지나치기 힘든 예술작품이다. 거대한 지느러미가 산에서 비죽 튀어나온 듯한 입구는 초록색, 흰색의 판유리 조각들이 맥박이 뛰듯 깜빡이고 있다. 작가는 "인류를 이끄는 등대의 불빛"이란 의미를 담아 '영속적 파급'이란 이름을 붙였다. “누구라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지금 내가 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한다. “살아 숨쉬는 이 유산이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책임이라고 단정 짓지 말라. 바로 당신의 책임이고 우리 모두의 책임이니까.” 인류의 미래, 스발바르가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다.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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