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수백채 집부자 뒤엔 '깡통전세'..보증금 못받고 신용불량 위기

김윤주 2021. 2. 22.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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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부동산대책]갭투기 주택 세입자의 눈물
(상) 전세금 되찾기 고군분투
대출 끼고 겨우 마련한 전세금
집주인 갭투기에 못 돌려받아
피해자 대부분 2030·신혼부부
"불면증에 공황·가정불화 겪어"
신축 빌라 등 다세대주택을 중심으로 벌어진 ‘갭투기’에 20~30대 사회초년생·신혼부부들이 고통을 호소한다. ‘갭투기꾼’에게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금전적·정신적 피해에 시달리는 이들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갭투기는 집주인이 부동산중개업자·건축주·분양대행사 등과 공모해 매매 가격과 전세금의 격차가 적은 주택을 다량 매수한 뒤 임차인을 희생양 삼아 이익을 챙기는 ‘은밀한 거래’다.
<한겨레>는 ‘갭투기대응시민모임’의 도움을 받아, 수도권에 흩어져 있는 피해 임차인 108명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다세대·다가구 주택이 밀집된 서울 마포구 공덕동 주택가 사이 도로로 차량들이 지나가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2억8500만원. 박아무개(30)씨의 신혼 첫 보금자리 전세보증금이자 그가 동대문에서 수년간 옷 장사를 하며 갚아온 대출금이다. 이제는 돌려받을 수 없는 돈이 됐다. “부동산에선 집주인이 집을 몇백채 가지고 있는 부자라고 소개했어요. 그런 부자가 나에게 돌려줄 전세금이 없겠나 싶어서 안전한 집인 줄로만 알았어요. 돈 한 푼 없이 자기 소유 집을 수백채씩 늘릴 수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으니까요.”

그는 아내와 2018년 6월 서울 종로구 숭인동의 한 다세대주택에 전세로 들어갔다. 집주인 김씨는 주택 586채(지난해 6월 기준)를 보유한 임대사업자다. 박씨는 지난달 온 우편물을 보고 집이 지난해 12월 강제경매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집주인은 연락이 닿지 않았고, 집주인의 대리인은 전세금을 반환해줄 수 없으니 다음 세입자를 구하거나 집을 사라고 했다. 올해 이사 가려 했지만 옴짝달싹 못 하게 됐다. 그는 온라인 커뮤니티와 메신저 대화방 등 갭투기 피해자 모임을 찾았고, 자신과 같은 피해자 수백명을 만났다.

21일 <한겨레>가 ‘갭투기대응시민모임’을 통해 확보한 서울과 수도권 피해자 108명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피해자 대부분은 20~30대 사회초년생과 신혼부부로 1억~3억원대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응답자들은 대부분 2018년 전후에 전세계약을 맺고, 계약 만기 시점인 2019년 말~2020년 피해 사실을 인지(85.2%)했다. 이들의 피해 실태를 살피는 조사는 이번이 처음이다.

조사 결과를 보면, 피해 보증금 액수는 1억원 이상~2억원 미만이 55.5%로 가장 많았고, 2억원 이상~3억원 미만이 34.3%, 1억원 미만 7.4%, 3억원 이상~4억원 미만 2.8%였다. 주거 형태(중복 응답)는 신축을 제외한 다세대주택 50%, 신축 건물 47.2%, 근린생활시설 14.8%, 불법증축 건물 9.3% 순이었다. 피해자의 41.7%는 계약기간 만기 전이었고,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 채 계약 만기 뒤 1년 이내라는 응답은 30.6%였다.

박아무개(42)씨의 서울 양천구 신월동 빌라 전세금 1억4500만원은 그가 20대 초반부터 일하며 모은 전재산이었다. 집주인이 세금을 내지 않아 지난해 9월 김포세무서에서 압류가 들어왔고, 지난해 11월 계약이 끝났지만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해 계속 그 집에 살고 있다. 계약 당시 등기부등본을 확인하고, 전입신고를 하고 확정일자도 받았다. 박씨에게 “아무 문제 없는 집”이라고 공언했던 부동산 중개업소는 폐업 상태였다. 결국 박씨는 전세금을 회수하기 위해 소송을 하고 집을 경매로 낙찰받으려 한다. 당장 소송 비용과 경매 비용, 이후 내야 할 취득세까지 수천만원을 부담하기 위해 대출을 받아야 할 상황이다. 박씨는 “주택청약이나 공공임대주택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원치도 않는 집을 떠안아 무주택자 혜택만 받지 못하게 됐다”고 토로했다.

대부분 대출로 전세보증금을 마련한 터라 피해자들의 속은 타들어간다. 설문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81.5%는 대출을 받았고, 17.5%는 대출금을 반환하지 못해 신용불량 위기를 겪었다고 답했다. 전아무개(27)씨는 2018년 11월 직장 때문에 상경해 2억500만원에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한 신축 빌라를 구했다. 전세자금 대출 1억4800만원과 신용대출 1200만원을 받았다. 매달 50만원씩 나가는 대출 이자가 부담스러워서 만기 전에 이사를 하려고 했지만, 결국 대출을 연장하고 전세금 반환 소송을 진행 중이다. “소송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추가로 대출 연장이 안 돼서 대출금을 못 갚게 될까 봐 그게 제일 걱정돼요. 한순간에 제가 신용불량자가 되는 거잖아요. 불안해서 잠이 잘 안 오니까 밤마다 술을 마셔요.”

피해자들의 82.4%가 전세보증금반환보증에 가입하지 않아 뾰족한 대책을 찾지 못한다. 591채(지난해 6월 기준)를 소유한 임대사업자 진아무개씨의 세입자인 심아무개(33)씨는 2019년 10월 서울 은평구 역촌동의 한 빌라를 1억원에 전세계약했다. 7천만원을 정부가 지원하는 버팀목 대출에 기댔다. 진씨가 주택도시보증공사의 ‘블랙리스트’에 올라 전세보증금반환보증에 가입하지 못한 심씨는 “적은 이자로 전세를 살면서 돈을 모아 내 집을 마련하고 싶었는데, 큰돈을 잃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의 22.2%는 임대인 문제로, 34.4%는 불법증축 등 임대 매물의 문제 때문에 보험에 가입하지 못했다. 보험 제도를 모르거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가입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결국 갭투기 피해자들은 전세금을 되찾기 위해 소송 등을 진행하며 시간적·금전적 피해를 본다. 이를 아는 임대인은 웃돈 수백만원을 자신에게 얹어주고 집을 사라고 제안하기도 한다. 서울 동작구 대방동의 한 빌라에 전세금 2억5천만원을 내고 들어간 이아무개(37)씨는 지난해 12월 임대인에게 전세금은 돌려줄 수 없으니 웃돈 300만원을 내고 법무사 비용 등을 부담하면 집의 소유권을 이전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이씨는 “당연히 줘야 하는 돈을 주지 않고 비용을 더 내고 사가라는 식이어서 불쾌했지만, 소송과 경매 등에 돈과 시간을 쓰는 것보다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전세금을 올리고 다음 세입자를 구해 오면 전세금을 돌려주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 문제가 있는 집을 다른 임차인에게 떠넘기는 ‘폭탄 돌리기’로 피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드는 데 기여하게 되는 구조다. 이러한 제안을 받은 박아무개(30)씨는 “잘못된 걸 알지만 다른 임차인을 구해 돈을 되찾고 빨리 이 집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고 털어놨다. 실제 계약이 이뤄지진 않았지만 전세를 내놓자 15팀이 집을 보러 오기도 했다.

피해자들은 변호사를 구해 법적 대응을 하거나, 어쩔 수 없이 집을 매수하는 과정 등에서 최소 수백만원의 비용을 지출한다. 피해자들은 ‘일주일 이상 우울감이 계속된다’(79.6%·중복 응답), ‘스트레스로 인한 질환으로 병원을 다닌다’(24%), ‘가정불화를 겪었다’(32.4%), ‘직장 업무에 방해된다’(87%) 등 정신적 피해도 겪었다고 답했다. “불면증, 심한 공황발작, 정신질환 등으로 병원에 다녔다”, “해외주재원으로 근무하던 중 피해 대응을 위해 입국해야 해 직장을 잃었다”, “가정불화로 이혼을 했다”, “주택청약, 서울주택도시공사(SH)에서 주관하는 장기 전세 등에 당첨됐지만 입주를 포기했다”, “다른 집에 이사를 가려다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해 계약 파기로 위약금을 물었다” 등의 호소도 나왔다.

피해자들은 임대인을 형사처벌로 압박하고 싶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엄정숙 변호사는 “사기죄가 성립하려면 고의성이 인정돼야 하는데, 갭투기의 경우 고의성 입증이 쉽지 않다”며 “만약 형사처벌이 이뤄지면 임대인에게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해 전세금을 돌려받기 수월해질 것”이라고 짚었다. 갭투기대응시민모임은 “갭투기 피해를 막기 위해 보증사고를 일으킨 임대인에 대한 행정적 조처 및 처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건축주·분양대행사·공인중개사·임대사업자 ‘은밀한 거래’
신축빌라 매맷값 시세보다 전셋값 높게 받은 뒤 나눠가져

장아무개(33)씨는 지난 2018년 4월 서울 금천구 시흥동의 한 신축 빌라에 전세금 1억6천만원을 내고 입주했다. 중개업자는 아직 분양이 끝나지 않은 건물이기 때문에 우선 건축주 세명과 계약하면, 집주인이 장씨가 낸 전세금과 자기 돈을 합쳐 집을 매매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편적인 거래 방식이다. 안심해도 된다”는 중개업자 말을 믿었다. 인근 부동산업소 여러곳도 이 집을 보여줬고, 같은 거래 방식을 이야기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씨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순간 갭투기의 늪에 빠졌다.
갭투자는 매매가격과 전세가격 간 격차가 작을 때 그 차이(갭)만큼의 투자금액으로 주택을 매수하고, 시세차익을 노리는 부동산 투자 방법이다. 그러나 장씨 같은 피해가 발생하는 건 신축 빌라 등 시세 파악이 어려운 주택을 놓고 일부 집주인, 부동산 중개업자, 건축주, 분양대행사 등이 공모해 수백채를 두고 투자가 아닌 ‘투기’를 하기 때문이다.
세입자는 모르는 ‘건축주-임대사업자(명의대여자)-부동산 중개업자’의 은밀한 거래가 갭투기 생태계를 이룬다. 예를 들면, 중개업자가 전세를 구하는 사람에게 시세 1억4천만원인 주택을 보증금 1억6천만원으로 소개해 건축주나 기존 임대인과 전세 계약을 맺게 한 뒤, 곧바로 임대사업자가 이 집을 매입하면서 갭투기가 이뤄진다. 전세보증금을 확보한 건축주나 기존 임대인은 미분양을 줄이고 집을 처분할 수 있고, 임대사업자는 자기 자본 없이 집을 소유할 수 있다. 세입자에게 받은 ‘웃돈’ 2천만원은 임대사업자와 중개업자가 나눠 갖는 ‘리베이트’가 된다. 이런 방식으로 1천만원씩 10채만 소유해도 임대사업자와 중개업자는 1억원을 벌게 된다. 임대사업자들은 수백채에 이르는 주택을 이러한 방식으로 소유한다. 부동산 업소는 단기간에 폐업하는 ‘기획부동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줄 여력이 없는 임대사업자는 세입자의 연락을 피하거나, 대응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피해를 전가한다.
세입자가 전세보증금반환보증에 가입한 경우 주택도시보증공사 등에서 전세금을 대신 반환하는데, 일부 임대사업자는 경매 등 법적 절차가 진행될 때까지 빈집을 수개월간 단기로 빌려주며 수익을 올리기도 한다. 지난달 초부터 이러한 단기임대 사업을 돕는 아르바이트를 한 ㄱ씨는 “세입자들이 보증보험으로 전세금을 받고 나간 빈집 80채가량을 단기 임대해 한달 순수익만 3천만원을 거둔다”며 “임대사업자는 ‘보증보험으로 전세금을 받고 나간 사람들이 있으니 자신은 갭투기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다’며 당당한 태도를 보인다”고 털어놨다.

김윤주 기자 ky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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