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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로 끌려간 오빠, 임신한 아내도 살해.. 법원서 온 편지

변상철 입력 2021. 02. 22.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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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여년 만에 재심 결정 통보받은 김인근씨.. "내가 살아온 이유는 단 하나"

[변상철 기자]

 
 재심결정문
ⓒ 변상철
  
지난 2월 15일 제주도 화북에 사는 김인근씨에게 제주지방법원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조심스럽게 뜯어본 등기 우편에는 제주지방법원(제2형사부 재판부 판사 장창수)이 오빠 김호근에 대한 재심을 개시한다는 결정문이 들어 있었다.

"편지 받으면 겁부터 덜컥 나. 봐도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고."

김인근씨는 제주 4.3의 피해자다. 오빠 김호근은 4.3 사건이 나기 전 공무원으로 재직하다 퇴직하고 집안일을 돕고 있었다고 한다. 화북 마을의 우익단체였던 대한청년단의 단원으로도 활동하면서 좌익단체의 입산 요구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8년 4월경 새벽에 들이닥친 산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산에 끌려갔다고 한다.

"아, 새벽에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어머니가 마당에서 막 우시는 거야. 왜 우시냐고 했더니 새벽에 산사람들이 내려와서 '우리는 이렇게 싸우고 있는데 너만 따뜻한 방에서 배부르게 잘살고 있느냐'며 오빠를 데리고 갔다는 거라. 아버지도 슬퍼 우시고. 2살, 4살 조카랑 만삭의 새언니는 소리 내서 울지도 못하고... 말도 못 했지."

그렇게 무장대에 끌려간 오빠는 1949년 봄, 다행히 무장대를 빠져나와 하산 후 자수했지만, 귀순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빠는 제주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받고 동척회사라는 곳에 수감되었다. 강제로 입산하게 된 사정을 수사기관에서는 전혀 고려해 주지 않았다. 동척회사에 수감되어 있던 오빠는 하루에 한 번 물을 길으러 동척회사 근처 우물로 나왔고, 김인근씨는 그때만을 기다렸다가 우물로 가는 길목에서 오빠를 만나 도시락을 전하곤 했다고 한다.

"오빠 얼굴이 아주 형편없어져버렸어. 머리 하나 옷깃 하나도 흐트러짐 없는 오빠였는데 머리는 귀신처럼 되고 수염도 못 깎고. 그래도 나한테 '엄마 잘 모시고 있어라. 그럼 오빠가 와서 공부도 시켜주고, 고무신도 새로 사줄 테니' 하며 다독였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오빠는 국방경비법 위반죄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배를 타고 육지로 이송되었고, 몇 달 뒤 마포형무소라고 소인이 찍힌 편지를 마지막으로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 죽었을 거라. 살아있었다면 지구 끝에서라도 찾아올 오빠인데 이렇게 못 돌아올 리가 없다니까. 너무 억울해. 너무 억울해. 아무 죄 없는 오빠를 이렇게 끌고 가서 소식도 모르게 했으니."

당시 법체계에 따르더라도 불법

다행히 국가기록원에 보존된 '수형인명부'에 오빠의 이름과 나이, 직업, 본적지, 언도 일자, 형량, 수감 교도소가 기재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재심이 이뤄지는 것은 어려웠다.

재심 결정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오빠 김인근의 생존 문제였다. 오빠 김호근이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뒤 행적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사망 여부가 확인되어야만 동생 김인근이 재심을 신청할 자격이 있다. 만에 하나 본인이 살아있다면 김인근은 재심 신청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이 사건 재심 청구일인 2019년 4월 22일 피고인 김호근(1928년생)의 연령이 90세"이라며 한국전쟁과 한국인의 평균 생존연령을 따져도 김호근의 생존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재심을 청구한 김인근의 재심청구 자격을 인정했다.

두 번째로 재심 사유다. 재판부는 김호근이 국방경비법 위반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수사과정에서 영장주의에 위배한 불법으로 구금된 이후 수사 도중 계속된 구타와 고문을 당하며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는 점을 들었다.

특히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 제9조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진다.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구금·수색·심문·처벌과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와 1948년 4월 1일 시행된 군정법령 제176호(구 형사소송법의 개정규정) 제3조 "누구든지 구속당할 자의 성명 및 피의 사건을 기재한 재판소가 발한 구속 영장 없이는 신체의 구속을 받지 아니한다"에 의하더라도 이를 위반한 것이다.

특히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에 열린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은 사람들의 수가 모두 2530명에 이르는데(제주 4.3 사건 보고서) 이들 모두 법령이 정한 절차에 따라 영장이 발부된 바가 없고, 당시 형식적인 재판조차 받지 못한 채 즉결 처분된 사례가 다수이며, 취조 시 고문이 자행되었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마지막으로 재판부는 "재심 제도는 법적 안정성을 일부 양보하면서까지 확정된 유죄판결에 대하여 일정한 사유가 있는 경우 재심을 요구하는 사람의 이익을 위한 비상 구제"라며 "이 사건처럼 사건이 발생한 때로부터 70년이 넘는 과거의 일에 관하여 재심 개시의 사유를 엄격하게 따질 경우 자칫 재심 제도의 이유나 정의의 관념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라고 재심 결정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네"
  
 재심결정을 축하하러 온 강광보 할아버지와 반갑게 인사하는 김인근 할머니.
ⓒ 변상철
 
김인근씨는 오빠의 강제 입산으로 인해 1949년 1월 아버지, 언니, 새언니, 2살·4살 조카, 그리고 새언니 뱃속의 아이까지 모두 학살당하는 비극을 당해야 했다. 어머니는 생존했지만 7발의 총탄에 아래턱을 잃었다. 오빠의 무죄만이 빨갱이 집안이라는 불명예와 억울하게 죽어간 가족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개도 집을 나가 며칠 안 들어오면 찾으러 나가는 게 인지상정인데, 오빠는 왜 안 찾아주는 거야. 이건 나라가 잘못된 거 아니야? 내가 살아온 이유는 단 하나. 우리 오빠 명예회복 그리고 억울하게 죽어간 우리 가족들 한을 풀어주는 것이야. 백 사람 중 한 사람만이라도 내 얘기를 들어주면 된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다 보니 이런 날도 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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