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에서 고성까지 3,000km 독수리가 날아오는 이유

김정흠 2021. 2. 23.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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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 독수리가 찾아왔다. 그것도 떼로.
몽골에 사는 독수리가 23년간 고성을 찾는 구구절절한 사연.

매년 겨울, 고성에는 수백 마리의 독수리가 모여든다

저 멀리 보이는 북쪽 끝 산봉우리의 꼭대기, 지역 주민들이 연지산이라고 부르는 산의 정상 위로 검은 점 서너 개가 빙빙 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이제는 수십 개의 점이 저마다의 규칙으로 움직인다. 숫자는 점점 많아진다. 이제는 서쪽에서도 한 무리의 검은 물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독수리다. 이미 벌판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무리의 독수리 떼는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와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

먹이를 향해 날아드는 독수리에게서 날렵함이 느껴진다

빵빵한 마대 자루 10여 개가 벌판에 놓인다. 자루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노끈을 풀어 내자, 그 안에서 소와 돼지의 비곗덩어리 그리고 부산물들이 한가득 쏟아진다. 겨울철이면 일주일에 너댓 번씩 열리는 점심 뷔페 시간.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것은 갑작스레 등장한 까마귀 떼다. 분명 어딘가에 숨어서 이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터. 사방에서 무리를 지어 천천히

다가오고 있던 독수리 떼가 이 불청객을 보고는 잠시 주춤한다. 다시 멀리 날아가기도, 혹은 벌판에 앉아 상황을 예의주시하기도 한다. 토종 텃새인 까마귀와 몽골에서 날아온 겨울 철새 독수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신경전. 긴장되는 순간이다.

큼지막한 독수리 한 마리가 들판에 착륙을 시도한다. 우두머리가 선봉대를 자처한 모양이다. 까마귀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듯하다가도, 한꺼번에 날아오르며 푸드덕거린다. 명백히 상대에게 겁을 주기 위한 행동이다. 의외로 이게 효과가 있다. 독수리들은 멀찌감치 도망간다. 까마귀들은 우세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먹이를 향해 조금씩 다가간다. 덩치에 맞지 않게 겁을 먹은 독수리들은 한참을 멀리서 지켜만 보다가, 결국 한꺼번에 내려앉는 방법을 택하기로 한다. 물론, 이번에도 우두머리가 선봉이다.

광활한 고성의 전경

●독수리 그리고 사람이 겨울을 나는 법

매년 겨울, 경상남도 고성군에는 독수리 떼가 모여든다. 몽골 등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서식하는 독수리들이 겨울마다 이곳을 찾는 이유는 간단하다. 겨울을 나기 위함이다.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혹독한 겨울 날씨가 이어지는 몽골에서 벗어나 비교적 따뜻한 한반도까지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오는 것이다. 매년 겨울, 철원 등 자연이 잘 보존된 DMZ 인근에서 독수리 떼를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전방 지역에서 군 생활을 한 경험이 있는 친구들의 군대 시절 이야기(물론 과장이 섞인)를 들어 보면, 독수리가 비둘기만큼이나 많이 보인다고들 하잖은가.

그런데 경상남도 고성이라니. 먹이 경쟁에서 밀린, 대개 어린 독수리들이 철원을 지나 이곳 고성까지 내려온다. 독수리의 주요 먹이는 동물의 사체들이다. 독수리는 맹금류라는 분류와는 다르게 의외로 살아 있는 동물을 사냥하는 능력이 거의 없어서, 고성은 겨울을 나기에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니다. 농업이 발달해 개활지가 많고, 그로 인해 야생동물보다는 가축이 많기 때문이다. 그나마 농약에 중독되어 죽은 야생동물들이 독수리의 먹이가 되어 주기는 했다. 당연하게도 그 결과는 2차 중독. 몇몇 독수리들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독수리 할아버지’ 김덕성 선생님은 23년째 고성에서 독수리 먹이 주기 활동을 주도하고 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가 있었다. 철성고등학교에서 재직 중이었던 김덕성 선생이다. 그는 들판에서 괴로워하며 죽어 가던 독수리를 만난 뒤, 이들에게 직접 먹이를 주어야겠다는 결심을 세웠단다. 1998년의 일이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정육점에서 고기를 팔고 버려지는 부산물과 비곗덩어리 등을 모았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시작한 일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무려 23년이나.

김덕성 선생이 말을 꺼냈다. “독수리는 한 번에 알을 하나만 낳습니다. 세계적으로 2만 마리가 채 안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새끼 독수리가 3살까지 자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확률은 20%에 불과하죠. 번식지이자 서식지인 몽골의 환경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 그 이유 중 하나입니다. 여러 지역에서 개발이 진행 중이거든요. 월동지인 한반도에서 좋은 먹이를 공급해 이들의 생존력을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게르의 내부 전경

이곳을 찾아오는 독수리를 위해 일주일에 약 1t 정도의 먹이를 공급한다. 하루에 약 300kg씩 3~4일에 걸쳐 나누어 준다. 고성군과 인접 지역에 그들을 위한 식당을 차리는 것이다. 독수리의 월동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들이다. 이제는 단순히 독수리에게 먹이를 주는 활동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일부 개체에 윙태그(wing tag, 인식표)를 달아 이동 경로를 파악하는 등 체계적으로 독수리를 연구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보았다.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독수리가 찾는 곳이 바로 여기, 고성군이 된 것이다.

뒤늦게 찾아오는 독수리들에게도 충분히 먹을 만한 먹이가 제공된다

●한바탕 파티가 끝나고 나면

얼마나 기다렸을까. 들판에 내려앉고도 먹이를 향해 다가올 생각을 않던 독수리 무리가 갑자기 먹이를 향해 날아든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때가 된 것이다. 공중에서 활공하며 다른 독수리를 불러 모으고 있던 이들도 하나씩 먹이가 있는 곳으로 내려선다. 거대한 날개를 펴서 공기 저항을 만들고, 날카로운 발을 뻗어 계획한 지점에 정확히 착지한다. 마치 SF영화에서 우주선이 착륙하는 장면을 보는 듯하다. 장관이다.

독수리들은 따뜻한 개활지에 앉아 쉬는 걸 즐긴다

독수리와 까마귀 세력 사이에서 한바탕 전쟁이라도 터질 줄 알았건만, 예상과 달리 먹이를 나누는 쪽을 택한다. 늘 그렇다. 살아 있는 것들과의 싸움에는 영 소질이 없는 독수리들은 싸우기보다는 먹이에 집중하는 편이다. 까마귀보다 훨씬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까마귀는 이리저리 독수리 사이로 파고들어 먹이를 가지고 달아난다. 그래 봐야 그 양이 많지는 않다. 남은 것은 모두 독수리들의 몫이니 괜찮다.

쌍안경으로 독수리를 관찰하는 지도사, 방문객에게 재미있는 독수리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간의 기다림, 30분의 식사 시간이 모두 끝났다. 오늘의 식사를 만족스럽게 마친 독수리들은 논두렁에 일렬로 길게 앉아 휴식을 취한다. 친구들과 담소라도 나누는 것일까. 중앙아시아를 여행했던 때 길거리에서 봤던 독수리와는 다르게, 고성을 찾은 독수리들은 미련 없이 다시 보금자리로 떠났다. 그들을 최대한 야생 상태로 보호하려는, 사람들의 따스한 마음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들판 옆에 게르와 돔을 설치해 실내 공간을 만들고 탐조객을 맞이한다
체험장에서는 독수리 관련 교육이 진행된다
독수리와 관련된 여러 체험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PROGRAM
날아라 고성 독수리

이번 겨울부터 고성군에서는 독수리체험장을 마련해 일반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먹이 주기 활동을 하는 주요 지점, 철성고등학교 뒤 기월리 들판 탐조대에서 독수리가 먹이를 먹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몽골식 게르로 실내 공간을 만들어 독수리와 관련된 생태 교육을 진행하며, 열쇠고리 만들기 등 몇 가지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체험 프로그램은 독수리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시간과 동일한 화ㆍ목ㆍ토ㆍ일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진행된다. 체험장과 가까운 곳에 삼국시대 가야의 유적인 송학동 고분군이 있어 함께 둘러보기에도 좋다.

독수리탐조센터
주소: 경남 고성군 고성읍 기월리 251-3 일원(고성군의회 주차 후 도보로 약 250m 이동)
운영시간: 체험│매주 화ㆍ목ㆍ토ㆍ일요일 10:00~12:00(웹사이트에서 예약 필수)
요금: 1인 5,000원
전화: 사무국장 010 7730 5921
홈페이지: 고성독수리.kr

가야 유적인 송학동 고분군은 고성을 대표하는 여행지 중 하나다

▶대머리 독수리는 틀린 말이라고?

독수리는 대한민국 천연기념물 243-1호로 지정된 수리목 수리과의 대형 맹금류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맹금류로 알려졌는데, 몸통 크기만 해도 성인 남성 상체와 비슷하다고 할 정도로 거대하다. 참고로 날개를 펼쳤을 때를 기준으로 최대 3m까지 자라기도 한다고.

놀랍게도 독수리는 매년 겨울 한반도를 찾는 철새다. 여름철엔 몽골 일대에서 서식하다가 겨울에 한반도로 날아오는 식으로 추위를 이겨 낸다. 한반도는 세계에서 독수리가 가장 많이 찾아오는 도래지로 알려졌으나, 우리나라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이들의 먹이가 많이 줄어들었다. 동물의 사체를 먹이로 하는 독수리에게 야생동물이 살 수 없는 환경이 늘어난다는 것은 먹이를 찾을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과 같으니까. 천연기념물이자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된 독수리를 보호하기 위해 매년 겨울, 여러 단체가 그들의 월동지에 먹이를 공급하는 이유다.

독수리에 관한 잘못된 정보들을 소개한다. 우선 독수리가 사냥을 잘할 것이라는 편견이다. 다른 수리과 맹금류(영어로는 ‘eagle’이라 부르는)와 혼동하는 데서 비롯된 생각이다. 독수리처럼 동물의 사체를 주요 먹이로 하는 맹금류는 벌처(vulture)라는 명칭으로 구분한다. 독수리는 대머리인 것으로도 알려졌다. 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부위에 비해 짧고 성체가 되면 하얗게 새는 탓에 대머리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름도 대머리 독(?)을 써서 독수리다. 그러나 ‘대머리 독수리’라고 부르는 것은 삼가자. ‘역전’을 ‘역전 앞’으로 표기하는 것처럼 겹말 오류다. 물론 독수리를 ‘대머리수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글ㆍ사진 김정흠 에디터 김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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