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한겨레

텍사스 정전, 재생에너지 탓 아닌 '전력 시장 자유화' 참사였다

조기원 입력 2021. 02. 23. 13:56 수정 2021. 02. 23. 15:16

기사 도구 모음

음성 기사 옵션 조절 레이어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400만 가구 전기 끊기고, 일부 가정은 전기요금 1800만원도
보수지 WSJ "한때 전력망 모델"이었던 "텍사스 약점" 비판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21일(현지시각) 촬영한 고압 송전탑. 휴스턴/AFP 연합뉴스

“텍사스 전력망은 한때 모델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번 정전으로 시장 구조에 약점이 있음이 드러났다.(…) 겨울 폭풍으로 풍력부터 (천연가스 등 화석연료 사용) 발전소까지 거의 모든 에너지원이 마비됐는데, 사업자들이 영하의 온도에서도 전기를 생산할 수 있는 투자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전력 공급자가 집단적으로 (전력 공급에) 실패했지만 이 회사들은 어떤 법규도 어기지 않았다. 텍사스 당국자들은 사업자에게 (법규상) 혹한과 혹서기에도 제대로 발전소가 가동할 수 있게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추가 투자를 하도록 요구할 수 없다.”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신문 <월스트리트 저널>이 최근 보도한 내용의 일부다. 한때 470여만 가구에 전기가 끊기고, 한달 전기요금이 1800여만원에 이른 텍사스주 전력 부족 사태의 원인이 무리한 ‘전력 시장 자유화’로 결론 나는 분위기다. 일부 보수 정치인과 언론이 재생에너지의 한계를 집요하게 공격했지만, 실상은 비용 절감과 자율 경쟁에만 몰두한 나머지 ‘대비할 수 있었던 재난’에 대비하지 않은 ‘시장 논리’가 문제였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미국 텍사스 댈러스의 주민 이벳 칸투가 19일(현지시각) 한파로 전기 요금이 3천달러 이상으로 치솟은 것을 보여주는 스마트폰 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댈러스 AP/연합뉴스

<뉴욕타임스>도 22일(현지시각) 텍사스주가 1999년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 주지사로 재임할 당시 전력 공급을 민간에 맡기는 시장화 정책을 도입했으며, 업체들의 가격 인하 경쟁이 무리한 비용 절감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텍사스에 매장된 풍부한 천연가스와 풍력 발전에 이용하기 좋은 바람 덕에 전기요금은 인하됐지만, 규제 완화로 예외적 상황에 대비할 안전장치와 규제는 적어졌다고 짚었다.

지난 15일(현지시각) 정전이 처음 발생했을 때, 텍사스의 주요 전력 공급원인 천연가스, 풍력, 원자력 모두가 한파로 일부 멈춰 섰다. 천연가스는 가스관이 얼어버렸고, 풍력 발전소 일부에서 터빈이 얼어붙었다. 원전 2곳에 있는 원자로 4기 중 1기도 배관 동결로 48시간 이상 가동이 멈췄다. 겨울철 텍사스 전력 공급 대부분을 담당하는 천연가스와 일부 석탄 화력 발전에서 총 2만9천메가와트가, 풍력 발전에서 1만6천메가와트가 끊겼다. 굳이 이번 정전 사태의 가장 큰 원인을 꼽으라면, 풍력 발전이 아니라 천연가스 발전이 문제였던 셈이다. 하지만 혹한기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느 발전소나 문제가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현대사회를 움직이는 근간인 ‘전력 발전’이, 비록 이례적이라고는 하나 ‘영하 20도’에 속수무책 멈춰 서버렸다. 이번 사태를 이해하려면, 1990년대 후반 미 전역에서 시작된 전력 시장 자유화와 이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텍사스주의 전력 정책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번 이상 한파가 미국 남부 텍사스에 들이닥친 30년 만의 혹한이라고는 하나, 도저히 예측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 텍사스주에서는 2011년 2월에도 혹한으로 발전소 200곳이 가동을 멈췄다. 당시 8시간 동안 1백여만 가구가 정전의 영향을 받았다. 2014년 1월에도 혹한 탓에 4시간 동안 ‘블랙아웃’ 상황이 재현됐다. 텍사스의 겨울이 통상 따뜻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기적으로 혹한이 닥치고 있으니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온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2011년 사태 이후엔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가 나서 텍사스주에 “혹한기 전기 공급에 이상이 없도록 대비를 해라”고 권고했다.

최악의 한파로 수돗물 공급이 끊긴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버틀러 스타디움에 21일(현지시간) 식수를 배급받기 위해 온 주민들의 차량이 줄지어 서 있다. 주 당국은 식수 오염 가능성을 대비해 물을 끓여 먹으라는 지침을 내렸다. 휴스턴 로이터/연합뉴스
최악의 한파가 덮친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21일(현지시간) 푸드뱅크 직원들이 주민들이 타고 온 차에 식료품을 실어주고 있다. 한파 직격탄을 맞은 텍사스주는 대규모 정전 사태에 이어 식수난과 식량난까지 겹쳤다. 휴스턴 AP/연합뉴스

텍사스는 ‘혹한기 예외적 상황’에 대한 대비를 ‘시장 메커니즘’으로 해결하는 구조를 택했다.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시기에 비싼 요금을 받을 수 있게 했으니, 전력 공급자들이 예외적 상황에서 비싼 요금을 받기 위해서라도 혹한기 투자를 하리라는 논리였다. 텍사스 전력 공급망을 관리하는 전기신뢰성위원회(ERCOT) 빌 마그네스 최고경영자는 18일 “투자를 하지 않는 업자는 시장에서 재정적 결과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서 보듯, 시장에서 싼 가격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경쟁하는 업자들이 언제 닥칠지 모를 ‘예외적 상황’에 대비한 투자를 결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미국 보수파들은 재생에너지, 특히 풍력 발전을 텍사스 정전 사태의 주범으로 거론했지만, 사실 풍력 발전 터빈은 혹한 대비 설비만 갖추면 영하에서도 너끈하다. 겨울철 혹한이 일상적인 캐나다 정부의 발표를 보면, 일부 터빈은 섭씨 영하 30도에서도 문제가 없다. 텍사스대 에너지 자원 분야 교수인 마이클 웨버는 <시엔엔>(CNN)에 “대비가 되어 있는 곳에서는 추운 기후에서도 풍력 발전이 잘 작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뉴욕 타임스>는 풍력 발전은 혹한에 대비해 터빈에 발생하는 얼음을 제거하는 장치가 필수적이지만, 텍사스 업체들이 남부 텍사스에 한파가 닥치는 경우가 없다며 얼음 제거 장치를 설치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텍사스가 독자 전력망에 묶여 있어 다른 주에서 전기를 끌어오지 못한 것도 이번 사태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미국 대부분 주들은 비상 상황 때 다른 주에서 전기를 융통할 수 있다. 반면 텍사스는 연방정부 규제를 피하기 위해 독자적인 전력망을 고집하다 사달이 났다. 이 역시 전력 시장을 극단적으로 자유화했을 때 벌어지는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반면교사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