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들이 때려 아프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시끄럽다' 했어요"

오세진 2021. 2. 23.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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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림되는 학교폭력 방치하는 학교들

대학생 이선우(이하 가명)씨는 일반계 고교 신입생으로 입학한 첫날 경험한 일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날 학교 선배들이 이씨를 포함한 1학년 학생들을 한 반에 모이도록 했다. 선배들은 갑자기 욕설과 함께 “눈 깔아!”, “선배는 하늘이다” 등의 말을 하며 앞으로 선배들을 만나면 ‘90도 인사’를 할 것을 강요했다.

이씨는 “이후 선배들이 학교 기숙사에서 1학년 학생들을 집합시켰는데 어떤 선배가 다짜고짜 서 있던 친구들 뺨을 한 대씩 때리기 시작했다”면서 “이유는 몇몇 친구들이 선배들에게 인사를 잘 하지 않아서였다”고 말했다.

최근 일부 운동선수와 방송인이 과거에 학교폭력 가해자였다는 피해자들의 폭로가 잇따르면서 학교폭력 문제의 심각성이 다시 대두됐다. 일부 인사들은 가해사실을 인정했고, 정부는 체육계에 만연한 폭력을 근절할 수 있는 대책 마련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가 이런 학교폭력 문제를 인지하고도 묵인하는 한 학교폭력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23일 국내학술지 ‘아시아교육연구’에 등재된 논문 ‘선후배 간 위계문화를 통한 학교폭력 경험에 대한 연구’를 보면 이 논문은 중·고교 시절 학교폭력을 경험한 대학생 6명의 이야기를 실었다. 이들은 중·고교에 진학하자마자 선배들로부터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규칙 준수를 강요받았다고 했다.

체육계열 특수목적 중·고교를 다닌 서하윤씨는 “선배들이 선배들 수만큼 인사를 하게 한다거나 후배들은 급식을 국물도 남기면 안 되며 국그릇을 들고 마시는 행위를 할 수 없도록 했다. 식사를 시작할 때도 선배들 수만큼 ‘맛있게 드세요’라고 인사를 해야 했다”고 말했다.

일반계 고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일반계 고교 동아리에서 학교폭력을 당했다는 김도현씨는 “형들이 와서 운동을 하기 전에 식음료랑 비품을 준비해야 했다. 체육관 코트 먼지를 걸레로 전부 닦는 것도 신입생들의 몫이었다”면서 “준비 시간이 부족해 급식을 거르기 일쑤였다. 하지만 정말 열심히 준비하려고 해도 놓치는 것이 있었고 그때마다 항상 형들한테 혼났다”고 했다.

연구 참여자들은 선배의 폭력을 ‘교육’으로 정당화하는 학교 분위기 속에서 뚜렷한 대응 방법을 찾지 못하는 동안 본인도 모르게 이 위계문화에 익숙해져갔다고 털어놨다. 서씨는 “코치님은 대답소리가 작아진 것을 지적하며 3학년 전체에게 후배들의 ‘군기’를 잡을 것을 요구했다”면서 “이후 동기들이 후배들을 다시 규제하기 시작했고, 모든 것이 대물림됐다”고 말했다.

예술계열 특수목적 중학교를 다닌 박서연씨는 “3학년이 되니 그동안 선배들에게 받았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기분을 느낌과 동시에 소위 ‘후배들을 관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그동안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가한 제약들이 굉장히 어이가 없지만 그 시절에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일종의 규율처럼 느껴졌다. 우리도 그랬으니 후배들도 그래야 한다는 보복심리도 작용했다”고 했다.

그런데 학교는 이렇게 폭력이 대물림되는 구조를 알고도 해결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속하도록 했다는 것이 연구 참여자들의 설명이다.

일반계 고교 운동부 출신의 최우진씨는 “1학년 때 선배들에게 심하게 맞은 후 수업에 들어갔는데 수업 중에 너무 아파서 신음을 내고 말았다. 그러자 당시 수업 교사는 ‘시끄럽게 할거면 뒤에 나가 서있어!’라고 했다”며 “운동부에서 맞고 올라와서 그러니 한번만 봐달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래도 안 된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교사들이 학교폭력 현장을 목격하고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가 교실에 모여서 선배들 위협을 듣고 있을 때 전 똑똑히 봤어요. 선생님들이 우리가 모인 교실 창문을 지나 급식실로 갔고, 심지어 한 선생님은 저랑 눈이 마주치기까지 했어요. 저는 선생님들이 우리 모습을 보고 교실 안으로 뛰어와 선배들 행동을 제지할 줄 알았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교실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저는 선생님들이 이런 위계질서를 긍정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하려는 학교의 대응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눈앞에 보이는 상황을 종료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일반계 고교 동아리에서 학교폭력을 경험한 윤서준씨는 “한 후배의 학부모가 교감선생님에게 동아리 폭력 문제를 신고했고 우리 동아리는 없어졌다”면서 “갑자기 극단적인 조치를 당하니 선배들은 그 잘못을 후배들에게 돌렸다”고 했다.

박씨는 “담임선생님이 교실에 오셔서 상황을 파악했다. 그런데 학교폭력을 주도한 학생들의 입시 실기를 담당한 선생님들이 자신들이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결국 가해학생들이 입시를 앞둔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생활기록부에 기재하지는 않되 봉사활동으로 대체’하고 ‘후배들에게 직접 사과’하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됐다”고 밝혔다.

이 논문을 쓴 이은지 연세대 교육연구소 전문연구원은 “연구에 참여한 두 집단(일반계열 학생 3명, 체육계열 학생 3명) 학생들이 겪은 학교폭력 경험은 차이가 거의 없었다. 모두 본인들이 속한 학교 안에서 학년에 따라 피해자→가해자→방관자 순의 역할을 경험했고, 이런 구조에서 학교폭력 피해자로서 적극적으로 대응할 방법은 거의 없었다”면서 “폭력은 학교 구성원이 바뀌어도 집단적으로 대물림됐다”고 설명했다.

이 전문연구원은 이어 “이런 상황에서 개인의 공감 능력이나 도덕성은 위계문화로 인해 발생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면서 “현재 학교폭력 예방 프로그램은 여전히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적 구도를 유지하며 공감 능력 등 개인의 내적 변인을 바꾸는데 집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즉 폭력을 재생산하는 구조를 무너뜨리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이 전문연구원은 “학교 내 성인 구성원들은 무관심, 위계문화를 긍정하는 태도, 입시 실적 등을 이유로 학교폭력 문제에 대해 방관한 경우가 많았다”면서 “폭력에 친화적인 학교 문화를 바꾸기 위해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폭력예방 교육을 강화하고, 교육을 통해 문제 해결에 나선 교사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그들의 교권에 대한 보호 조치도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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