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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탄 책임 없는데 재산분할도 불리.. 생활·양육비는 '독박' [가정 못 지키는 가족법]

- 입력 2021. 02. 24. 06:07 수정 2021. 02. 24.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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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 유책 배우자들의 희망, '파탄주의'
파탄 시점 이후 재산은 분할 못해
'딴살림' 길수록 유책배우자에 유리
'유언대용신탁'·거액 보험 들기 등
재산 빼돌리기 막을 뾰족수 없어
양육비·위자료 청구 못해 생활고
남은 배우자·자녀 보호조항 없어
보완책 없는 파탄주의 시기상조
축출이혼 사전에 막기 힘들어져
헌법재판소가 2015년 간통죄를 폐지하는 결정을 내린 뒤 가족 관계가 근본적 변화를 겪고 있다. 법원은 이혼 소송에서 가정 파탄 책임이 있는 배우자의 이혼 청구도 받아들이는 ‘파탄주의’를 수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현실적으로 혼인생활을 지속하기 힘든 상황이 됐을 경우 가정 파탄의 책임 유무를 묻지 말고 이혼을 인정해야 한다는 흐름이다. 이런 세태로 가정 해체 현상은 심화하고 혼인 파탄의 책임이 없는 배우자와 자녀는 법적 사각 지대에 놓이게 된다. 취재팀은 ‘범현대가의 축출이혼’ 사례를 취재하면서 민법의 가족 관계 조항이 정작 가족을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을 봤다. 가정 파탄의 책임이 있는 배우자가 상대 배우자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경우에는 특히 그랬다. 정몽익 KCC 글라스 회장 이혼 사건을 통해 현행 가족법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개선 방안을 모색한다.
 
의사를 꿈꾸는 남편을 묵묵히 뒷바라지하며 사실상 가장의 역할을 해온 A씨는 지난해 갑자기 날아든 이혼청구 소송 서류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병원을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남편이 “성격이 안 맞아 함께 못 살겠다”며 법원에 이혼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남편에겐 이미 오래전부터 사귀어온 여자가 있었다. 남편은 소유 재산들을 차곡차곡 빼돌린 상태였다. 날벼락을 맞은 A씨는 실의에 빠진 채 소송에 대응하고 있다.

우리 가족법은 ‘축출이혼’(유책배우자가 무책배우자를 고의로 쫓아내는 이혼) 위기에 놓인 A씨를 구제하거나 도와줄 수 있을까? 대법원은 혼인 파탄의 책임이 있는 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판례(유책주의)를 유지하고 있는 만큼 이 판례가 변경되지 않는 한, 남편의 이혼 청구는 기각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A씨도 남편에게 양육비나 위자료를 요구할 법적 근거도 없다. 별거 상태에 있더라도 법률혼 상태이기 때문이다. 남편이 자녀들 양육비를 건네도록 강제할 법도 없다. 소송이 종료될 때까지는 생활비와 자녀 양육비 등이 모두 A씨 몫으로 남는다.

원치 않는 이혼은 누구에게나 닥쳐올 수 있는 현실이다. 현행 유책주의 관점에서는 이혼 거부라는 강력한 대응책이 있지만 파탄주의가 도입되면 이마저도 사라진다. 축출이혼은 한층 수월해지고 이혼으로 인한 불이익도 없으니 유책배우자는 사실상 면죄부를 받게 되는 것이다. 정몽익(59) KCC글라스 회장이 무책배우자인 최은정(58)씨에게 제기한 이혼소송에서 최종 패소하고도, “시대 흐름상 파탄주의가 도입될 것”이란 취지로 다시 이혼소송을 제기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강자의 부당행위에 법은 속수무책

23일 법조계에 따르면 재산분할은 이혼소송의 핵심 절차이지만 이와 관련된 법원 판례는 일방적으로 이혼소송을 당한 책임 없는 배우자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 재산분할 기간 산정이 특히 그렇다. 유책배우자의 부정행위로 가정이 파탄 났을 경우, 우리 법원은 파탄 시점 이후라면 유책배우자가 취득한 재산은 재산분할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가령 유책배우자가 2020년 말 가정을 버리고 다른 사람과 살림을 차렸더라도 상대인 무책배우자는 2020년까지 형성된 재산에 대해서만 분할을 청구할 수 있다. 2021년부터 벌어들은 수익은 유책배우자 몫이란 뜻이다. 따라서 법률상 혼인관계를 청산하지 못하더라도 일찌감치 배우자를 버리고 ‘딴살림’을 차린 기간이 길면 길수록 유책배우자에게 유리한 실정이다.
우리 민법이 유책배우자의 부정, 부당행위에 취약한 점도 문제로 꼽힌다. 곳곳에 유책배우자가 재산을 빼돌릴 수 있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최근 유책배우자들 사이에서 ‘핫한’ 수법이 ‘유언대용신탁’이다. 이는 사망자가 금융사에 사후 수익자를 지정하는 계약이다. 자산을 유언대용신탁에 맡긴 뒤 사후 수익자를 정하면 자산의 소유권은 신탁받은 금융기관으로 넘어간다.
거액의 보험상품에 가입한 뒤 내연녀나 혼외자를 보험 수익자로 지정해놓는 수법도 활용된다. 법무법인 SH의 남성태 변호사는 “내연녀와 혼외자에게 아예 현금을 주는 등 법정에서 입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산을 빼돌릴 수 있지만, 그건 초보적인 수법”이라며 “유언대용신탁이나 보험 등 합법적인 재산 빼돌리기 방법을 동원하면 유류분청구소송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억울한 이혼소송을 당한 배우자들이 협의이혼에 응하는 경우도 많다. 이때도 유책배우자는 재산분할 과정에서 상대 배우자에게 가는 몫을 줄이기 위해 민법 조항들을 최대한 활용한다. 법무법인 숭인의 양소영 변호사는 “결혼 역시 민법상 신의성실 원칙이 지켜져야 하는 영역인데도 유책배우자가 이혼청구를 하게 되면 무책배우자는 ‘왜 법은 날 지켜주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지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섣부른 파탄주의 도입 우려

이처럼 유책배우자들은 각종 편법을 쓸 수 있지만, 남겨진 가족을 보호할 법적 조항은 없는 상황에서 파탄주의 도입은 시기상조라는 지적이다.
해외 주요국의 경우 이혼을 해도 남겨진 가족의 생계 안정을 위해 일정 기간 다른쪽 배우자에게 부양 의무를 부과한다. 이 조항에 기대 육아 등으로 경력이 단절된 가정주부도 직업을 찾거나, 관련 교육을 받는 등 사회에 복귀할 여력을 가지게 된다. 이들 나라는 이혼이 보다 쉽게 결정되는 파탄주의를 채택하면서도 보완조항을 마련하고 있지만, 우리 민법에는 아직 이런 조항이 구비돼 있지 않다.

이혼 위자료 청구 제도도 유명무실해 축출이혼을 사전에 막는 역할을 하기는 어렵다. 현재 법원이 인정하는 위자료의 상한은 5000만원 수준이다. 이는 일반적인 가정을 기준으로 해도 부정을 사전에 억제하거나 남은 가족의 생계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려운 금액이다. 정 회장의 부인 최씨가 법원에 청구한 위자료는 5억원이다. 법조계에서는 최씨가 청구한 위자료도 실제 재판에서는 훨씬 낮은 액수에서 결정될 것으로 전망한다.

특별기획취재팀=조현일·박현준·김청윤 기자 hjunpar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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