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수립→대한민국 정부 수립'.. 교과서 무단수정한 교육부 간부 징역형

박세미 기자 2021. 2. 26. 03: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집필자 동의없이 불법으로 고쳐.. 법원, 징역 8개월·집유 2년 선고

박근혜 정부 때 집필된 초등학교 6학년 사회 교과서에서 ‘대한민국 수립’ 문구를 집필자 동의 없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무단 수정한 혐의로 기소됐던 교육부 간부에 대해 법원이 징역형을 선고했다.

대전지법 형사5단독 박준범 판사는 25일 직권남용, 사문서 위조 교사 등 혐의로 기소된 전 교육부 과장 A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그간 교육부는 “집필자들이 자율적으로 수정한 것”이라고 주장해왔지만, 교과서 수정 기획부터 여론 조작, ‘집필자 패싱(건너뛰기)’, 협의록 위조 등 전 과정에 교육부가 불법 개입했다고 법원이 인정한 것이다.

◇'가짜 민원' 접수에 ‘도둑 날인'까지

A씨는 교육부 교과서정책과장으로 재직하던 2018년 초등학교 6학년용 국정 사회 교과서 내용을 총 213곳 수정하는 과정에서 집필 책임자인 박용조 진주교대 교수의 동의를 받지 않은 혐의로 지난 2019년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교과서에서 ‘대한민국 수립’ 문구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바뀌고, ‘북한은 여전히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는 문장이 삭제되는 등 현 정권 입맛에 맞춰 수정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문제는 박 교수가 “나도 모르게 정권 입맛에 맞게 교과서 내용이 수정됐다”고 폭로하면서 불거졌다. 그러자 교육부는 “집필자들이 자율적으로 수정한 것으로, 우리는 내용을 전혀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교과서 수정 과정에서 A씨가 각종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점을 인정했다. A씨가 2017년 직원인 B 연구사에게 “민원이 있으면 (교과서를) 수정하는 데 수월하다”며 ‘가짜 민원'을 국민신문고에 접수시킬 것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또 박용조 교수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를 고칠 수는 없다”며 수정을 거부하자, 다른 교수가 대신 수정을 맡도록 한 사실도 인정했다.

A씨는 출판사 담당자에게 교과서 수정을 위한 ‘협의록’을 위조하란 지시도 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또 A씨는 B 연구사에게 박용조 교수가 이 협의 과정에 참여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박 교수 도장까지 ‘도둑 날인’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수정된 사회 교과서는 전국 초등학교 6064곳, 학생 43만3721명에게 배포돼 교재로 쓰였다.

재판부는 “교육부 수정 요청을 한 차례 거절했다는 이유만으로 편찬위원장을 완전히 의사 결정에서 배제했다”며 “피고인은 미래 세대 교육을 책임지는 교육부에서 중요한 사무를 담당하던 중 이런 범행을 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B 연구사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출판사 담당자는 벌금 200만원 선고 유예를 내렸다.

◇교육부 “개인 문제”라며 모르쇠

하지만 교과서 불법 수정에 ‘윗선' 지시가 있었는지는 결국 밝혀지지 않았다. 당초 검찰이 A씨와 B 연구사 등 교육부 실무진 2명을 교과서 불법 수정의 최종 책임자로 보고 기소했기 때문이다. 검찰은 김상곤 당시 교육부 장관 등은 제대로 조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교육계에선 “현 정부 역사관대로 교과서를 고치다 벌어진 일인데, 책임은 실무 관료가 모두 뒤집어썼다”는 말이 나왔다.

A씨 거취도 논란이다. 국가공무원법은 ‘형사사건으로 기소된 자에 대해선 직위를 부여하지 아니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A씨는 기소된 뒤 육아휴직을 했고, 현재 국립대에 근무 중이다. 이 때문에 야권에선 “윗선까지 수사가 번지지 않게 A씨가 ‘총대’를 메서 보은(報恩)을 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나왔다. 다만 이번 1심 판결로 징계위에 회부될 가능성이 크다.

이날 교육부는 “교과서 수정 규정이 미비해 벌어진 일로, 교육부가 별도로 취할 입장은 없다”고 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검찰이 A씨와 B 연구사 두 개인을 기소한 것”이라며 “항소 여부도 A씨와 그 변호인이 알아서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부 과장이 재직 때 벌인 불법행위에 대해 사실상 ‘꼬리 자르기' 한 것이다.

그동안 교육부 수장들은 “아무런 불법행위가 없었다”고 해왔다. 김상곤 전 교육부 장관은 “(교과서 수정은) 출판사와 집필자들의 문제”라고 했고, 유은혜 교육부 장관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한 과정”이라며 “교육부가 개입한 바 없다”고 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