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해원의 말글 탐험] [136] 차라리 담담했더라면
차는 부동(不動), 전화는 불통(不通). 겹치기 주차에 속이 탔다. 급한 일로 얼른 떠야 하는데. 옆줄 차를 빼달라 해? 포기하고 택시? 굳은 머리 굴리다 겨우 통화 성공. 길 터준 차에 그새 후진등(後進燈)이 들어왔다. 후딱 나가라는 듯. 알량한 너그러움 따위를 다지던 마음이 틀어졌다. 모르는 사람한테 미안하다 한마디 않더니. 그래, 이런 일 아니어도 세상은 넓고 따질 건 많다.
‘옷장엔 무려 초등학교 때 입던 옷이 들어 있었다.’ ‘무려(無慮)’는 생각보다 수(數)가 많음을 나타내는 부사(副詞). ‘초등학교’를 꾸며 어색하다. 이때는 ‘심지어’가 어울린다. 아니면 ‘무려 20여 년 전 입던’ 하든가. ‘그는 70세에 무려 박사 학위를 받았다’가 아니라 ‘그는 무려 70세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가 올바른 표현이듯.
‘저자는 무려 마이클 샌델이다.’ 사람을 꾸몄으니 마찬가지. 비슷한 말로 ‘자그마치 마이클 샌델’ 해도 당연히 우스꽝스럽다. ‘바로’ ‘그 유명한’ 같은 수식어라야 어울리니까. 굳이 ‘무려’를 쓰려거든 ‘(판매량) 수백만 부를 올린’ 따위를 덧붙이면 되겠다.
엉뚱하게 쓰는 말 하나 더. ‘그가 친지들과 준비하는 어머니 제사는 차라리 잔치에 가깝다.’ 앞보다 뒤의 사물이 마땅치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나음을 말할 때 쓰는 부사가 ‘차라리’다. 한데 잔치는 통념상 마땅치 않은 일도 아니요, 상대적이 아닌 보편적으로 좋은 느낌이라 궁합이 안 맞는다. ‘차라리’를 아예 쓰지 않거나 ‘오히려’로 바꾸면 자연스럽다.
‘군사력에 화폐 주조권까지 가진 동인도회사는 차라리 준(準)국가였다.’ ‘차라리’가 명사만을 꾸미는 바람에 이상해졌다. 위 보기와 다르게 ‘오히려’로 대체해도 역시 그렇다. 이때는 ‘차라리 준국가라 하는 편이 옳았다’ 식으로 써야 한다.
400일 넘긴 코로나 사태. 백신 접종 이제 시작이란다. 세계에서 무려 102번, 차라리 ‘방역 한국’ 호들갑 떨지 않았더라면…. /글지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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