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기의 사이언스토리] 시대 따라 변한 달력… 새해 기준은 생명이 생동하는 봄

민태기 에스앤에이치연구소장·공학박사 2021. 2. 26.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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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정월 대보름… 정월은 12간지 셋째 달 ‘인(寅)월’
기원전 104년 사마천, 봄 맞는 셋째 달을 새해 첫 달로
로마선 권력자 입맛대로… 기원전 46년, 445일 ‘최장’
카이사르, 시민 축제 위해 개혁, 춘분·대보름 맞춰 조정
지금의 달력 낳은 건 과학과 삶 조화 추구한 인류 노력
달력

오늘은 정월대보름이다. 그런데 정월은 12간지의 셋째 달이다. 밤이 가장 깊은 ‘자시(子時)’에서 하루가 시작하듯 밤이 가장 긴 동짓달 ‘자월(子月)’이 한 해의 시작이었다. 이를 바꾼 것은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이다. 천체를 기록하는 업무를 맡던 그는 새해를 봄으로 바꾸고 싶었다. 천문 법칙으로는 추운 동짓달이 맞겠지만, 봄을 맞는 ‘인월(寅月)’, 즉 12간지 중 셋째 달에 새해를 맞는 것이 인간을 위한 것이라 보았다. 이렇게 기원전 104년에 발표된 새 달력에서 이듬해 ‘인월’이 1월로 바뀌고, 세 번째 달의 보름이 정월대보름이 되었다.

같은 시기, 로마도 음력을 사용했다. 라틴어로 ‘칼렌다이(Kalendae)’는 달이 차기 시작하는 날이고 ‘이두스(Idus)’는 보름이다. 영어 ‘캘린더(calendar)’는 이처럼 로마의 음력에서 비롯했다. 로마 역시 셋째 달 보름, 즉 ‘3월 보름(Idus Martiae)’이 한 해의 시작이었다. 기원전 154년, 급변사태로 집정관의 임기가 갑자기 1월로 당겨진다. 공화정의 임기는 1년이기에, 후임 집정관도 1월에 임기를 시작하며 행정 달력의 첫 달은 1월로 굳어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3월 보름이 새해였기에 달력을 둘러싸고 혼란이 일어났다.

무엇보다 1년의 길이가 문제였다. 달의 주기는 29일 남짓이라 12달을 합해도 태양의 1년 주기보다 짧다. 계절은 태양의 움직임으로 결정되므로 달력이 계절과 일치하려면 윤달이 필요했다. 태양의 주기를 365.25016일로 계산한 사마천은 계절에 맞도록 윤달의 규칙을 새로 만들었다. 태양 고도가 가장 낮은 동지를 반드시 음력 11월에 오게 해서 정월대보름에 봄을 맞게 했다. 이와 달리 로마의 윤달은 권력자들이 임의로 결정했다. 집권 기간을 늘리려고 윤달을 넣기도 하고, 윤달을 빼서 임기를 빨리 시작하기도 했다. 이처럼 로마에서 1년의 길이는 수시로 바뀌었다. 게다가 공화정 말기의 내전으로 누구도 윤달을 챙기지 않아 달력과 계절은 점점 벌어졌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널 무렵, 엉망이 된 달력 때문에 새해로 삼던 3월 보름은 봄이 아니라 한겨울에 왔다. 그는 혼란을 바로잡아야 했다. 먼저 1년의 길이에 누구도 손대지 못하도록 이집트 원정에서 알게 된 태양력으로 고정했다. 1년을 365일로 하고, 4년마다 366일의 윤년을 두어 사마천과 거의 같은 365.25일에 맞춘다. 달력이 자신들의 손에서 벗어나자 기득권에서는 반발이 터져 나왔다. 또한, 월세를 받는 집주인에게도, 빚을 갚아야 하는 채무자에게도, 달력 수정은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새 달력이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과학이 필요했다. 카이사르는 겨울이 돼버린 3월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천문학자들의 도움으로 로마인들이 중요시하던 3월 25일 축제를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에 맞추면, 새 달력이 적용된 첫해 3월 15일에 보름달이 뜨는 것을 알았다. 어차피 다음 해부터는 3월 보름에 보름달은 없겠지만, 음력을 떠나보내는 로마인들에게 마지막 선물이었다. 이 시점을 놓치지 않으려고 기원전 46년의 길이를 무려 445일로 늘인다. 인류 역사상 가장 긴 한 해였다. 이렇게 춘분과 보름을 기준으로 정해진 것이 율리우스력이다.

율리우스력이 시작된 기원전 45년은 로마에서 처음으로 달력과 계절이 일치했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밀어붙인 달력 개혁을 포함한 원로원의 무력화는 기득권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히고, 다음 해인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된다. 그가 그렇게 소중히 아끼던 날이었다. 새 달력에서도 이날의 명칭은 ‘3월 보름(Idus Martiae)’이었지만 보름달은 뜨지 않았다. 그가 없어지자 달력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카이사르는 4년마다 윤년을 두라고 했지만, 로마인들은 이를 3년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가 이 오류를 깨달은 것은 무려 36년 뒤였고, 이를 바로 잡기 위해 12년 동안 윤년을 없애야 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서기 325년,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부활절의 날짜를 정했다. 카이사르가 춘분과 보름을 기준으로 삼았듯이, ‘춘분이 지난 첫 번째 보름이 있는 주의 일요일’이 부활절이 된다. 그런데 율리우스력의 1년은 태양 주기보다 5만분의 1이 길었다. 엄청난 정확도였지만, 미세한 오차가 누적되며 이미 춘분은 3월 21일로 당겨진 뒤였고, 차이는 더 벌어지고 있었다. 1582년의 춘분은 3월 11일이 되어 부활절은 점점 겨울에 가까워졌다. 달력 개정을 미룰 수 없던 로마 교황청은 달력에서 10일을 삭제해 이듬해 3월 21일이 다시 춘분이 되게 했다. 그리고 더는 춘분이 바뀌지 않게 율리우스력의 오차를 수정했다. 이것이 현재의 양력인 그레고리력이다.

오늘날 양력 체계가 로마 음력에서 출발했고 부활절 역시 음력이 포함된 것을 생각한다면, 양력과 음력은 오랫동안 서로 보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과학이 태양과 달의 움직임으로 1년의 길이를 정하는 데 애쓴 까닭은 누구도 달력을 함부로 바꾸지 못하게 해서 사람들에게 계절을 돌려주려던 것이다. 사마천이 정월대보름을, 카이사르가 춘분과 보름을 달력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모두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언제나 생명이 생동하는 봄이었다. 과학과 사람들의 삶을 조화시켜 인간의 눈으로 천체를 바라보려던 사마천과 카이사르를 생각하며 곧 다가올 봄을 기다리는 하루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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