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칼럼] 한번도 경험 못한 ‘신체제 자본가’들이 출현했다

박정훈 논설실장 2021. 2. 26.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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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부회장은 4세 승계는 없다고 공식 선언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재벌 총수들이 자본주의 구체제의 마지막 세대일 수 있다

한국 자본주의사(史)에서 2021년은 기념비적 해[年]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전혀 새로운 유형의 자본가들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카카오의 김범수, ‘배달의민족’의 김봉진 두 창업자가 재산 절반을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 사업으로 번 돈을 교육 불평등 같은 ‘사회문제’ 해결에 쓰겠다고 했다. 이는 곧 자녀에게 기업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각각 50대, 40대의 한창 나이다. 기업가로서 절정기에 부(富)의 세습을 끊고 사회 환원에 나선 것이다. 지금껏 한국에 이런 기업인은 없었다.

우아한형제들 김봉진 대표./김연정 객원기자

한국에서 기업의 역사는 곧 재벌의 역사였다. 총수로 통칭되는 대기업 오너들이 ‘확장 지상주의’와 ‘혈통 승계’라는 한국형 기업 문화를 확립시켰다. 자장면에서 미사일까지, 돈만 된다면 분야와 업종을 가리지 않는 것이 재벌의 법칙이었다. 그렇게 문어발 식으로 확장시킨 거대 기업군을 2세, 3세로 넘겨 확대 재생산을 거듭했다. 명(明)도, 암(暗)도, 재벌은 한국 경제 그 자체였다.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조선일보 DB

그리고 2021년, 김범수·김봉진으로 대표되는 신흥 기업가들이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을 제시했다. 편의상 이를 ’2021년 체제'라고 하자. 신체제의 키워드는 ‘네트워크’와 ‘사회 지향’이다. 신흥 자본가들은 대개 IT 사업가다. 디지털 플랫폼으로 대중과 개방적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부를 축적했다. 업종을 넘나드는 이(異)분야 확장은 이들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자신이 창업한 회사라도 영원히 자기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분신과도 같은 기업을 팔아 치우고 삶의 경로를 바꾸는 데 주저함이 없다. 유목민 같은 기업관이다.

김정주 넥슨 창업주..조선일보 DB

신체제 자본가들은 세습의 성채를 쌓지 않는다. 성공한 스타트업 기업인치고 자식에게 물려줄 궁리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게 그 바닥 상식이다. 구체제 재벌가(家)에선 가업 상속을 위해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잦았다. 신흥 자본가들에겐 상속이 관심거리가 아니다. 그러니 일감 몰아주기 같은 편법의 유혹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2021년 체제’의 자본가들은 ‘혈통’보다 ‘사회’를 중시한다. 김범수도, 김봉진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다른 사람에게 영감 주는 것”이 꿈이라 했다. 두 사람뿐 아니다. 넥슨 창업주 김정주는 1000억원을 내놓아 전국에 아동 재활병원을 짓고 있다. ‘배틀 그라운드’ 게임을 히트시킨 크래프톤의 장병규는 100억원을 카이스트에 기부했다. 재벌 중심의 구체제에선 기업인의 자발적 기부가 드물었다. 설사 하더라도 은퇴 후거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을 때 수동적 헌납이 주류였다. 반면 신흥 자본가들은 선제적으로 돈을 쓴다. 김범수 말대로 “내가 태어나기 전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다.

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도덕적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신체제 자본가들은 사업을 통해 사회 친화적 기업관을 학습했다. 비즈니스 자체가 사회와 연결된 쌍방향 네트워크 모델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사업 성패는 플랫폼에 대중을 얼마나 참여시키느냐에 달려있다. 카카오는 4000만 가입자, 배달의민족은 월 1500만명 이용자 덕분에 돈을 번다. 자신의 성공이 ‘사회적 호응’ 덕분이란 사실을 신흥 자본가들은 잘 안다. 그래서 사회에 빚을 졌다는 부채 의식이 있다. 반면 구체제 자본가들은 네트워크 아닌 생산요소 투입으로 돈을 번다. 자본을 투자하고 공장 지어 제품 만들어 파는 일방향 사업 모델이다. 사회적 관계에 덜 민감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재벌 시스템이 무조건 악(惡)인 것은 아닐 것이다. 이건희와 정몽구의 강력한 오너십이 아니었다면 삼성과 현대차의 성공은 없었다. 한국이 ‘반도체 치킨게임’의 최종 승자가 된 것도 다른 계열사에서 번 돈으로 손실을 메워넣는 ‘문어발 경영’의 힘이었다. 지금도 제조업 분야에선 오너 주도의 재벌 시스템이 강점을 발휘하고 있다. 그 가치를 폄훼해선 안 된다.

그러나 시대 상황은 결코 재벌 체제에 우호적이지 않다. 산업 패러다임이 디지털 기반의 네트워크 경제로 옮아가고 있다. 대중과 소통이 서툴고, 사회 친화적이지 못한 구체제 자본가에게 불리한 장(場)이 펼쳐졌다. 능력과 무관하게 경영권을 물려받는 승계 경영은 3세, 4세로 갈수록 경쟁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건희·정몽구 같은 인물이 나올 확률이 줄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회적 환경이 절대 불리하다. 기업에 대한 감시가 깐깐해지고 윤리적 요구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재벌 체제가 금방 소멸하진 않겠지만 방향은 정해져 있다. 멀지 않은 시일에 신체제 자본가들이 재벌을 대체해 한국 자본주의의 주류를 차지할 것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막대한 상속세 부담 때문에 물려주고 싶어도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재벌 총수들이 구체제 자본가의 마지막 세대일 수 있다. ‘재벌의 종언’은 이미 시작됐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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