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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코르셋에서 해방한 샤넬..1차 대전 터지면서 간편 여성 유니폼 인기

입력 2021. 02. 26. 06:13 수정 2021. 02. 26.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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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먹구름 일자 도빌로 옮겨..전쟁은 샤넬의 기초 탄탄히 다지는 계기로 작용

[류서영의 명품 이야기] 샤넬③

1913년 프랑스 도빌 매장 앞에 선 샤넬 /샤넬 코리아 제공


1913년 유럽엔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듬해 7월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하면서 4년간 지속된 1차 세계대전의 먹구름이다. 당시 프랑스 파리의 사교계에 터를 잡기 시작한 샤넬은 정치적·사회적 상황에 대해 관심을 별로 두지 않았다. 샤넬은 당시 유럽과 러시아에 퍼진 계급 투쟁도 안중에 없었다. 사넬은 의지와 뜻이 있으면 어떤 조건에서 태어나더라도 누구나 신분이 상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했다. 그러지 못한 사람들은 의지가 약한 사람으로 치부했다.

전쟁의 기운과 계급 투쟁 분위기의 확산 등으로 인해 사회가 뒤숭숭해지자 샤넬의 연인 보이 카펠은 당분간 안전한 장소로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샤넬에게 권했다. 샤넬은 프랑스 북서부 노르망디의 칼바도스 해안에 있는 도시 도빌로 갔다. 도빌은 영국과 마주하고 있다. 급박해지면 영국으로 건너가기 좋은 곳이다. 샤넬과 카펠은 1913년 초여름 도빌의 초호화 호텔인 ‘노르망디’의 특실에 짐을 풀었다. 

도빌은 파리의 상류층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다. 이 도시는 19세기 중반에 조성됐다. 농토·목초지·모래 언덕이었던 곳에 온천 단지가 들어섰다. 사우나·해수탕·담수탕을 구비한 휴양 시설이 건설됐다. 경마장·폴로경기장·비행장·카지노도 건설되면서 프랑스 상류층을 끌어들였다. 파리에서 200km밖에 떨어지지 않아 ‘파리의 해변’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샤넬과 카펠은 도빌에서 여름휴가만을 즐기지 않았다. 1910년 파리 캉봉가에 ‘샤넬 모드(CHANEL MODE)’를 열어 큰 성공을 거둔 샤넬은 도빌의 공토-비롱(Gontaut-Biron)가에 분점을 냈다. 당시 사진에 새겨진 샤넬 글씨체는 오늘날 전 세계에서 수많은 의류와 향수병·액세서리 등에 새겨진 로고와 같았다.


1928년 저지 슈트를 입고 자동차 옆에 서 있는 샤넬 /샤넬 코리아 제공


여성 운동 활발해진 시대 상황을 패션에 잘 반영

도빌에 패션 부티크를 연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다. 샤넬에게 도빌은 패션의 실험실로 만들기에 더없이 적합한 곳이었다. 상류층이 모이는 도빌의 해변가에 길게 이어진 산책로는 패션쇼 무대로 삼기에 좋은 장소였다. 샤넬은 이런 조건들을 충분히 활용하는 탁월한 감각을 보여 줬다.

샤넬은 시대 상황을 잘 활용했다. 그 당시 영국 여성 두명이 평평하고 챙이 없는 베레모를 쓰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런 유형의 베레모는 시골 농부들이 많이 쓰던 스타일이었다. 샤넬은 이런 간편하고 실용적인 스타일에 주목했다. 이미 루아얄리외에서 남성용만 있던 승마복을 여성용으로도 만들어 유행시킨 바 있는 샤넬은 도빌에서 또 한 번의 실험에 나섰다. 운동복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한 것이다. 여성들은 1900년처럼 화려한 스타일의 옷을 더 이상 입을 이유가 없었다. 여성 운동이 활발하던 시대 상황과 맞물려 거추장스러운 옷들이 짐으로 여겨지게 됐다. 

여성 참정 운동을 활발하게 벌인 영국의 에밀리 데이비슨이 1913년 경마장에서 국왕 소유의 말에 뛰어들어 사망한 사건은 화제가 됐다. 여성 차별 대우에 항의하기 위해 코르셋으로 꽁꽁 조이고 긴 치마를 입고 자해한 것이다. 샤넬은 이런 시대 상황을 여성복에 잘 스며들게 했다. 그가 후에 “나는 여성을 코르셋에서 해방시켰다”고 한 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었지만 그 나름의 방식으로 여성 운동에 기여한 것이다. 샤넬의 도빌 분점은 모자로 시작해 종합 패션을 아우르는 부티크로 발전을 거듭했다. 

이듬해 사라예보에서 울린 총성 한 발로 평화는 끝났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태자 부부가 피살된 사건으로 독일은 프랑스에 선전 포고했고 남자들은 전쟁에 징발돼 나갔다. 도빌의 호텔들은 군병원으로 사용됐다. 프랑스의 많은 여성들·아이들·노인들이 도빌로 피란 왔다.


1913년 프랑스 도빌 매장 앞에 선 샤넬 /샤넬 코리아 제공



“단순함 편안함 명쾌함이라는 패션 원칙 늘 준수”

전쟁은 샤넬에겐 인기를 구가하는 계기가 됐다. 여성들은 전쟁으로 활동하기 편한 옷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남자들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농사를 지어야 했고 공장에서 일해야 했으며 운전하고 소젖을 직접 짜야 했다. 이런 일을 하기에 샤넬의 실용적이고 편리한 옷이 안성맞춤이었다. 샤넬 옷은 여성들의 유니폼이 됐다. 도빌의 샤넬 부티크 뒷방은 사교계의 만남의 장으로 인기를 모았다. 프랑스 귀족 부인들이 샤넬의 부티크에 옷을 주문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샤넬 부티크는 전쟁과 패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가 됐다. 프랑스 상류층 부인들은 이곳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전쟁으로 인한 긴장을 풀었다. 

낙천적이었던 샤넬은 귀족 부인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다. 샤넬 제국은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탄탄한 기초를 다지게 됐다. 카펠도 전쟁을 통해 많은 이득을 얻었다. 전쟁으로 그가 소유한 석탄 수송용 화물선들의 활용이 많아지면서 거부가 됐다. 

샤넬이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 낸 첫째 신호탄으로 패션 전문가들은 ‘샤넬 스웨터’를 꼽는다. 샤넬 스웨터가 탄생한 배경은 이렇다. 경마장에 간 샤넬은 추운 날씨에 몸을 떨었다. 카펠의 폴로 셔츠를 빌려 입은 샤넬은 순간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남성 폴로 셔츠를 응용해 여성복을 만들었다. 그때까지 전혀 주목 받지 못한 저지감을 이용해 여유 있는 품을 두고 같은 색깔의 허리띠를 두른 셔츠를 만들면서 여성복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본격적인 여성 스포츠 웨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샤넬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나의 새 직업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나는 재봉사들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고 내가 모의하고 있는 혁명에 대해 전혀 몰랐다. 한 세계가 몰락하고 다른 세계가 태어나는 곳, 그냥 그곳에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주어진 기회를 활용했을 뿐이다. 나는 새로 태어난 세기만큼이나 어린아이 같았다. 그러나 어찌어찌하다 보니 새로운 패션 흐름이 내 것과 맞아떨어졌다. 단순함과 편안함과 명쾌함이 인기를 얻게 됐던 것이다. 나는 패션에 관한 한 늘 그런 원칙을 준수했다.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했다. 성공은 늘 우연히 만들어진다.”



류서영 여주대 패션산업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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